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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테이프 후폭풍] "테이프는 도둑질한 장물 공씨에 반납 받아 다 소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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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안기부 X파일'과 관련, 1999년 국가정보원 감찰실장을 지냈던 이건모(60.사진)씨는 28일 "99년 여름께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공운영(58)씨로부터 테이프 200여 개와 녹취록 등 두 상자 분량을 자진 반납받아 그해 12월 모두 소각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당시 천용택 원장에겐 "본 자료의 구체적 내용엔 접근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검찰 기자실에 보낸 '소위 X파일 관련 나의 입장'이라는 자필 문건에서 "이 도청자료는 공개되면 상상을 초월한 대혼란을 야기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걸친 붕괴가 올지도 모를 핵폭탄"이라고 했다. 이씨는 그러나 기자들과의 직접 접촉은 피했다.

이씨는 테이프 소각과 관련, "제 앞에서 보안과 P팀장과 직원으로 하여금 목록과 테이프를 일일이 확인토록 한 뒤 '내가 다 책임지겠다'는 결의로 전량 소각을 지시했고, 처리 후 결과를 보고받았다"고 했다.

그는 소각 이유에 대해 "저주스러운 불법의 산물이며 도둑질한 장물이며, 나라에 씻지 못할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요물을 장사지내기 위해서"라 했고 "장물은 아무리 가치가 크고 화려하고 내용이 중해도 장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당시 박지원 장관 등 고위층에 테이프를 제공한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는 테이프가 남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선 "회수분은 모두 소각했으나 외부 상황(외부에 남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장담 못한다"고 했다. 그는 또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X파일 내용 중에는 당시 공씨로부터 반납받은 자료에 없는 것들이 있어, 공씨가 유출자료 전량을 국정원에 넘기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판단됐다"며 추가 도청 테이프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천용택 원장에게 도청 테이프의 구체적 내용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씨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천 원장은 99년 12월 15일 검찰 출입기자들과 만나 "삼성이 중앙일보 고위 관계자를 통해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며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말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도 "정보기관 속성상 국정원장에게 내용을 보고하지 않고 소각할 수는 없다"며 이씨가 천 전 원장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씨는 국정원 광주지부장으로 재직하던 2002년 12월 국가정보원 내부 감찰정보를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2003년 4월 구속기소됐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최근 국정원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이철희.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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