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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②의식주] 17. 우리는 이렇게 놀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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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 연구관·문학박사)

▶ 고무줄 하나만 있으면 즐겁던 시절, 소녀들의 몸짓이 날아오르고 있다. <중앙포토>

“삼천 개구리 처녀 임금님의 생신/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음악대회를 열었다/토끼 할머니 토끼 사세요 여우 할머니 여우 사세요/찐빵 찐빵 지고지고 삼팔선.”

어렵사리 구한 고무줄을 다리에 걸고 폴짝폴짝 뛰면서 부른 고무줄놀이 노래다. 머슴애들은 시샘이라 하듯 줄을 끊고 줄행랑을 쳤고, 계집애들은 약이 올라 또다시 폴짝폴짝. 노랫말의 앞뒤가 맞지도 않을뿐더러 ‘지고지고 삼팔선’과 같은 말은 뜻도 몰랐으나 아이들은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다. 1960, 70년대 흔히 볼 수 있는 놀이 풍경이다.

이름도 낯선 놀이들-. ‘찐똘이’도 그렇고, ‘보물 다까리’에 하루해가 지는 줄도, ‘오징어가이샹’에 가랑이가 째지는 줄도 몰랐다. 놀이이름 역시 뜻도 몰랐지만 60, 70년대 농촌의 어린이들은 철따라 놀이를 바꾸며 놀았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보물 다까리’는 보물을 빼앗는다는 일본말[集り]이고, 오징어가이샹은 일본말 개전(開戰)에서 온 말이었다. 더러는 오징어가이샹을 ‘오징어 낌’이라 불렀는데, 이는 영어 게임(game)에서 온 말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알 리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다만 패를 지어 공격하고 수비하며 이겨야겠다는 일념으로 놀이에 흠뻑 빠졌을 따름이다.

변변한 놀잇감이 없었던 시절, 주위에 널려 있는 자연물이 당연히 놀이의 도구가 되었다. 돌조각으로 공기놀이·고누·비석치기를 했으며, 풀을 이용해 호드기를 불고 풀싸움을 하거나 풀각시를 만들어 놀았다. 여름철 쇠꼴을 베다 지치면 쇠꼴을 걸고 낫치기를 했고, 겨울철에는 솔가리를 긁다 힘들면 애써 모은 솔가리를 놓고 갈퀴치기를 했다. 넓은 공터나 고샅길에서 자치기를 하거나 굴렁쇠를 굴리며 뛰었다. 모두가 자연 그대로를 활용하고, 자연 속에 함께하는 놀이임엔 틀림없다.

놀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놀이는 뭐니뭐니 해도 겨울철이나 명절 때가 되면 벌어지는 윷놀이. 물론 막걸리가 주였지만 작은 내기에서 시작해 ‘내기윷’이라는 놀음으로 변하여 종내에는 멱살잡이로 끝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모나 윷이 나올 때마다 “모로구나 모-”라며 흥겹게 불러대는 소리는 동네를 흔들어대고도 남았다. 간혹 아이들이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애들은 가라, 가!” 호통소리에 목이 움츠러들며 어른들의 놀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노는 모습을 곁눈질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막이나 아무개 사랑에 모여 밤새도록 노름을 했다. 화투놀이가 노름으로 변한 것이다.

80년대는 스포츠가 프로라는 이름으로 등장, 보는 놀이로서 대중성을 확보해 갔다. 이른바 3S정책이라는 시각에서도 오명을 쓸 법하지만 분명한 것은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농구가 대중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다. 82년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프로야구는 막을 올렸는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구를 했다.

너나 없이 야구선수들의 이름과 그들의 활약상을 침을 튀기며 떠들기에 바빴고,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맨손야구를 즐겼다. 넉넉한 가정의 아이들이 멋진 유니폼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니는 것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민족적 사랑을 받아온 축구의 경우 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아예 ‘국민의 놀이’가 됐다. 마을마다 동네마다 조기축구회가 발족되고 86년 월드컵 이후 6회 연속 본선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게 전혀 우연이 아니다.

특히 80년대 들어 아파트가 다량 건설되고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놀이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고샅길을 누비던 아이들의 놀이는 사라지고, 차츰 닫힌 공간에서 혼자만의 놀이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사정은 컴퓨터의 보급도 마찬가지.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퐁’이라는 게임과 테트리스는 게임치곤 초보적이었으나 젊은이를 사로잡았다. 72년에 처음 선을 뵌 퐁은 두 개의 막대기를 조정해 공을 쳐내는 일종의 공놀이게임이다. 컴퓨터가 귀한 시절인지라 문방구의 오락기 앞에 쪼그려 앉아 이 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도시 아이들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80년대 후반에는 전자오락실이 전국 도시를 장악했고, 전자오락실은 젊은이들의 사랑방 구실을 해냈다. 수많은 청소년 문제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도시의 놀이는 이처럼 사랑방 형태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흔히 ‘온라인게임’이라 불리는 사이버놀이는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쾌속적인 변모를 꾀한다. 미국의 블리자드(Blizzard)가 개발한 ‘스타크래프트’를 시발점으로 다양화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PC방의 출현도 놀이문화를 급격하게 바꿔나갔다. 온라인게임들은 더욱 정교해지고 더욱 치밀해지면서 청소년의 보편적인 전국놀이로 자리잡고 말았다. PC방은 이제 낯설고 음침한 곳이 아니라 젊은이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온 국민의 놀이 ‘고스톱’ 속에 대통령들 다 있네

“고스톱이야말로 신이 만든 놀이다.”

고스톱이 인기를 끄는 것은 아무래도 화투 한 목과 신문 한 장만 있으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놀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워낙 재미있는 데다 걸리는 시간도 짧으며, 너나 없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의 게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계에 의하면 서울시민의 87.1%가 고스톱을 쳤다고 한다.

고스톱은 다른 놀이와는 확실히 다르다. 놀이를 하기 전에 세부 규칙을 합의한다는 점도 그렇고, 승자의 의지에 따라 마감(stop)과 계속(go)이 결정되는 이른바 개방성이 크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놀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하급수적인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대박이라 부름직한 대형사고를 누구나 칠 수 있고, 그래서 ‘한판’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놀이보다 높다. 이것이 고스톱이 가진 강점이자 뭇사람이 빠져드는 까닭이다. 알다시피 고스톱은 화투놀이의 하나다.

포르투갈의 ‘카르타’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변형됐다는 화 투는 우리나라에 들어오자마자 기존의 놀이인 골패나 투전을 밀어내버리고 일반적인 놀이가 되었고, ‘섰다’‘도리짓고 땡’‘육백’‘나이롱뻥’같이 다양한 놀이로 퍼졌다. 꾼이 아닌 사람들끼리는 그저 푼돈내기 민화투를 즐기거나 심심풀이로 재수떼기를 했지만 화투놀이는 가위 망국적인 놀이라 비난받을 만큼 성행했다. 그중 단연코 1위는 고스톱이다.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고스톱은 1950년대 일본의‘고이코이(こいこい)’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놀이를 하기 전에 규칙을 합의해야 하고, 승자의 뜻에 따라 놀이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며, 피 열 장을 1점으로 친다는 점 등이 매우 비슷하다. 이 놀이가 60년대 말 우리나라에 알려지고 70년대 중반 이후 일반화됐다는 것이다.

본디 화투는 20끗이니 열 끗이니 다섯 끗이니 하는 위계를 지닌 놀이인데, 고스톱은 이를 ‘위상적’ 놀이로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으로 3점을 나거나 피로 3점을 나거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모든 패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니, 어떤 이는 이를 민중의 위상이 강화된 민주주의가 구현된 놀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스톱은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만큼 시대상황을 두루 반영하기 때문이다. 유신공화국 때는 ‘박정희 고스톱’이 인기를 끌었다. 1등 마음대로 규칙을 바꿀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유신독재를 빗댄 것이다. 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자 ‘전두환 고스톱’이 생겼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꼭두각시가 되자 ‘최규하 고스톱’이 나왔다. 선(先)은 아무리 패가 좋아도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최규하 고스톱’이며, 판을 싹쓸이한 이는 상대방의 패 중 자신이 원하는 패를 한 장씩 가져간다는 것이 ‘전두환 고스톱’이었다. 5공 말기에는 또 다른 ‘전두환 고스톱’이 유행했는데, 주인공이 대머리라는 점에 착안하여 8광이 나오면 상대방의 패를 아무거나 가져오는 식이었다.

또 노태우 정권을 빗대어 ‘노태우 고스톱’도 유행했고, ‘DJ 고스톱’과 ‘홍트리오 고스톱’도 유행했다. 이처럼 고스톱은 세태를 반영하는 담론의 구실을 했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 질곡의 현실을 곱씹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오늘은 물론 내일, 그 다음다음 내일에도 고스톱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을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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