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 가상계좌·무통장 범죄로 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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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구속된 주모(35)씨 등이 만든 대포통장. 주씨 등은 대포통장 1만여 개를 개설해 개당 100만원씩 받고 도박 사이트 등에 판매했다. 법인은 여러 개 통장을 개설해도 의심을 덜 받는다는 점을 악용했다. 수사기관의 대포통장 단속이 강화되면서 가상계좌 개설 등 새로운 수법이 등장하고 있다. [뉴스1]

지난 5일 경기지방경찰청은 해외에서 대마초를 들여와 국내에 유통시킨 혐의로 송모(22)씨 등 3명을 구속했다. 송씨 등은 국제우편으로 대마초를 받은 뒤 e메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홍보해 구매자를 찾았다. 대마초 대금은 대포통장으로 받았다. 같은 날 안양만안경찰서는 2100억원 규모의 불법인터넷 도박사이트 조직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필리핀에 인터넷 서버를 두고 주기적으로 도박 사이트 도메인을 변경해 경찰 수사를 피하면서 대포통장 97개를 운용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대포통장이다. 범죄에 성공했더라도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드러나면 도루묵이 된다. 수사기관이 대포통장을 ‘사이버범죄의 핵심’으로 보고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는 이유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더욱 치밀한 수법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대포통장 수법을 개발하고 있다. 대포통장 전문 유통조직이 생겨나는 등 범죄의 분업화도 이뤄지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대포통장 억제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변종들이 생겨나 전체 규모는 줄었다고 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이 파악하고 있는 대포통장 규모는 연간 3만여 건이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과 금감원 등에 따르면 초기의 대포통장은 노숙자나 대학생들에게서 명의를 사들이는 직접 구매 방식이었다. 돈을 주고 은행에 통장을 개설하게 한 뒤 이를 범행에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금융 당국이 확인 절차를 강화하면서 줄어드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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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엔 범죄자들이 대포통장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다. “고소득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구인 광고를 내고 구직자에게 통장과 신분증을 넘겨달라고 하는 수법이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의 전화번호 등을 입수한 뒤 전화를 걸어 "대출해주겠다”며 퀵서비스를 이용해 직불카드와 비밀번호만 보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대포통장 거래조직이 기업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서울경찰청은 대포통장 1만여 개를 100만원씩에 유통시킨 조직을 검거했다. 총책 주모(35)씨는 동업자 17명과 함께 300여 개의 유령회사를 차린 뒤 이들 회사의 법인 명의로 20~30여 개씩 대포통장을 발행했다. 개인이 여러 개의 통장을 개설하면 금융 당국의 의심을 받지만 법인은 의심을 덜 받는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대포통장 사용 기간을 1~2개월 단위로 한정하고 판매한 대포통장에 문제가 생기면 비밀번호를 재설정해주는 ‘사후관리’까지 했다. 지난달에는 가상계좌를 대포통장처럼 쓰는 수법이 등장했다. 가상계좌 1만2000여 개를 개설한 후 인터넷도박, 보이스피싱 등을 하는 260여 개 조직에 제공하고 수수료 15억원을 받은 이모(52)씨 등 3명이 적발됐다. 이들은 가상계좌를 한번 이용할 때마다 건당 300~500원의 수수료를 받는 특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얼마 전부터는 대포통장 없이 현금화를 시키는 무통장 수법까지 나타나고 있다. 악성코드에 감염된 PC를 조작해 금융정보를 빼가는 ‘파밍’ 프로그램을 이용해 피해자 돈으로 물품을 구매한 뒤 현금화하는 방식 이다. 예전엔 파밍 프로그램으로 빼낸 돈을 대포통장에 넣은 다음 ATM기에서 인출했지만 최근엔 상품권이나 귀금속 같은 물품을 구입해 택배로 받은 뒤 현금화한다.

이상화 기자

◆가상계좌=기업 등이 다수의 고객이 송금한 돈을 관리하기 위해 고객 개인별로 부여하는 입금 확인용 계좌.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에 가구마다 다른 계좌번호가 적혀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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