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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현주소(20)천도교와 민중시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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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893년 2월11일 한성 경복궁 광화문 앞-.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천명의 동학교도들이 엎드려 상소를 올리며 연좌데모를 벌이는 이른바 「복소단식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29년 전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된 동학교조 최제우 대신사의 무죄승인과 포교의 자유였다.
한국근세사에 최초로 민중시위의 장을 연 이 같은 동학교도들의 복소는 선천의 낡은 관념과 가치관 등의 온갖 잔재를 물리치고 비약의 변혁과 빛나는 창조, 새로운 광명이 열리는 세상을 건설하자는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일종의 사회개혁운동이었다.
1892년 11월3일 수천명의 교도들이 전북 삼예역에 운집, 충청·전라 감사에게 동학교도에 대한 부당한 탄압정책을 시정하도록 서면 건의한 신원운동으로부터 횃불을 든 동학의 시위운동은 광화문 복합상소시위-보은취회-동학혁명-갑신개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광화문시위가 있은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벌인 충북 보은 장내에서의 교조무죄승인과 포교자유를 요구하는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은 수만명의 교도가 운집한 대대적인 시위였다.
조정은 일련의 이 같은 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계속 탄압했다.
그러나 동학은 1894년 3월21일 세계적인 민권선언의 갑오동학혁명을 일으켰다. 전라도 고부 동학교주 전봉준에 의해 봉기된 반봉건 민주혁명이었던 이 농민혁명은 ▲탐관오리 척결 ▲횡포한 부호처단 ▲불량한 유림응징 ▲노비문서의 소각 ▲천민의 대우개선 ▲과부의 개가허용 ▲무명잡세철폐 ▲지벌타파 ▲외세배격 ▲토지평균 분배 ▲공사가 동결 등 내외정에 대한 일대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농민 1천여명을 이끌고 고부군아를 습격, 점령한 전봉준의 동학군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준데 이어 보국안민·제포구민·척양척왜의 기치를 휘날리며 태인∼정읍∼고창∼함간∼전주∼공주에까지 이르렀다.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근대화의 신기원을 이룩하려했던 동학혁명은 청·왜군의 개입으로 40여만명이 희생된 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혁명은 한동안 왕조사에 가려 반역의 반란으로 기록된 채 묻혀 있었으나 최근 학계의 새로운 조명과 함께 활발한 연구가 펼쳐져 프랑스혁명보다도 규모가 컸었을 뿐 아니라 근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귀중한 민족사의 한 페이지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활화산 같은 민중시위와 혁명을 주도한 동학을 이끈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신수는 동학 입교 전 6년 동안 경상도 경주군 승광면에서 풍덕(지금의 면장)을 지낸 관리출신이었다.
그는 35세에 입교, 2년만에 교조가 됐고 1898년 6월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기까지 숨어 다니며 포교에 전력했다.
제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성사는 1904년 8월 진보회를 조직, 동학혁명 후 흐트러진 교도들을 규합시키며 전국 회원들로 하여금 일제히 머리를 깎고 옷을 간편하게 입는 등의 신문화운동을 일으켰다.
천도교 개화운동은 또 정부를 혁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다지려는 운동도 전개했다. 진보회를 통한 개화운동은 하루아침에 전국 수백개 지부에서 군중집회가 열리고 생활개선과 부패공무원(탐관오리)의 축출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의암 성사는 이용구 일파의 배신으로 이 운동이 실패에 돌아가자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 60여명의 배신파 교도를 출교시키고 교구를 설치하는 등 근대적인 종교체제를 갖추면서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후의 천도교는 보성사·보문관 등의 출판사를 경영, 『개벽』지 등을 발간하고 보성전문·동덕여고 등 30여개교의 학교운영에도 기여했다. 이밖에 『어린이』지를 발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며 『농민』지 발간과 함께 농민공생조합을 만들어 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등 신문화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천도교의 민중운동전통은 8·15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 1948년 3월1일 북한 전역의 교도들이 남북총선 실시를 주장하는 세칭 「3·1 재현운동」을 벌였다. 그후 「영우회」라는 비밀결사 등을 통한 천도교도들의 북한지역 반공투쟁은 1950년까지 계속됐고 많은 교도가 무참히 희생됐다.
창교 이념에서부터 사회개혁의지를 강력히 내포한 천도교 교리는 농민대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크나큰 역사의 족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천도교의 최근 30년 역사는 이 같은 훌륭한 전통과는 달리 교권분규, 교단재산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특히 최덕신 전 교령의 미국망명과 친북괴 선회는 천도교가 이바지해온 민족사적 공헌에 먹물을 칠한 오욕스런 사건이었다.
천도교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데 만족하지 말고 다시 새로운 민족사의 개척에 공헌할 힘을 길러야할 것 같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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