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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YWCA 60년<19> 김갑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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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구호아래 일어상용, 창씨등으로 우리민족 전체를 좀먹어 들어갔다는 것은 앞의 글에서 지적된바대로이지만, 특히 기독교인들·기독교회·기독교기관들을 곤란하게 한 것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다른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는 가르침이 기독교의 중요한 신조인만큼 이러한 강요는 기독교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들의 말로는 신사는 일본을 세운 신들을 모신 곳으로 조상들을 숭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있지만 기독교의 교역자들간에는 제각기 해석이 달랐고 그들이 취한 태도도 달랐다. 결국 이 문제때문에 많은 교역자들이 고초를 당했고 끝까지 버티다가 투옥된 이도 있었다.
반면 지금까지 추앙과 존경의 대상이던 유명인사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계통의 미션스쿨들도 두가지 태도로 나뉘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결국 폐교한데도 있는가 하면 그래도 학교를 샅려야겠다는 뜻에서 내키지 않는 순응을 한 학교도 있었다.
41년12월8일 진주만폭격으로 미일전쟁이 터진 후로는 매월8일을 신사참배의 날로 정하여 각급학교·사회단체들이 전부 동원되기도 했다.
그런 동원에 진저리가 난 한국인들은 내나라를 찾은 후에도 동원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된 것같다. 그들이 이렇게 발악적으로 우리민족을 얽어맨 이 모든 행위들은 너무 유치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식민지정책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는지.
이제 해방되기전 까지의 한국YWCA의 거취를 마무리짓는 이 지면의 끝을 남녀학생 하령회의 상황과 거기에 초청되었던 연사들에 대해 적어보겠다.
남녀기독학생 하령회는 그 첫번모임이 27년8월에 있었다. 남녀기독학생이란 YMCA· YWCA 학생회원들을 의미한다. 이 모임은 제7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그 때만해도 남녀학생들이 며칠동안 모임을 갖는다는 일은 대단히 드문일이었고 기독교기관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순수한 이들의 모임은 남과 녀의 생을 초월한 교양을 위한 모임으로 앞으로 이나라, 이 사회를 위해 일해보겠다는 젊은 패기와 사명감이라는 억센 의지에 잡념같은 것은 일어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비어있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였다.
내가 이화여전 2학년때 전교생이 모인 채플시간(매일 아침이면 가졌던 예배를 말함)에 기독학생 하령회에 다녀온 대표들의 보고를 들은 일이 기억난다. 그들의 보고는 우리 모두를 감격하게 했고 희망을 주었다.
이때의 기독학생회는 세계기구의 일원으로가 아닌 한국YMCA·YWCA에 소속된 학생(전문학교와 고등학교생들을 합한)회원들의 수양회 성격을 띤 모임이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53년에 이르러서야 대학생과 고등학생(Y-TEEN)이 분리되었다. 대학생부는 방년에 세계기구인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에 한국기독학생연맹(KSCC)을 통해 가입하게 되었다. 22년한국 YWCA가 창설되기 몇달전 김활란박사와 김필위씨가 참석했던 배경에서의 회의가 바로 이 WSCF회의였다. 해방후 47년에는 이 회의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열렸다.
그 회의는 해방후 첫 세계학생회의로 우리 한국YWCA학생대표로 이대 음대4학년생이었던 강서나양이, 지도자로는 당시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장영숙씨가 참석했다. 여기서 한가지 유감을 표시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사람 다 그 이후 YWCA일을 계속 돕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언어에 있는 것인데 그런 국제회의에는 언어, 특히 영어로 의사소통이 될 뿐 아니라 토의까지도 참여하려면 언어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대표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해방이후 37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런 국제회의에 보낼 대표들을 뽑는데 제한된 수에서 택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
이렇게 세계기구의 일원으로 학생YWCA는 해방이후 더욱 더 활발히 움직일 수가 있었고 연합회도 대학생부와 Y -TEEN부를 분리하여 특징있는 활동을 하게했다. 이 두부의 활동상황은 뒤로 미루고 그동안 1회에서부터 7회까지의 하령회에 초빙된 연사들에 대한 소개로 해방까지의 YWCA 모습을 끝내려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추앙하는 조만식·이상재씨M 비롯하여 정인보·윤치호씨 같은 애국지사, 대학자, 신문화의 선각자들이 연사로, 혹은 강사로 초빙되었으니 10대 혹은 20대 초반에 속하는 청소년들의 감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제목들도 거창한 것이어서『기독교정신과 매일의 일상생활』『종교와 민족성』 『청년의 자각』『우리의 나갈 길은』 등 당시 청년들의 책임감·사명감을 강조하는 제목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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