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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사나이”…「그린베레」|“나는 결국 속았다”…「침묵의 계율」깬 퇴역 톰슨 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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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의 CIA(중앙정보국)가 국익의 이름아래 세계 곳곳에서 불법적으로 첩보 및 파괴활동을 벌여온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계를 할퀴는 미국의 발톱은 CIA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즈 매거진 최근호는 흔히 그린베레로 불리며「용맹한 미군」의 상징으로 알려진 미 육군 특전 단이 지난 20여 년 동안 CIA와 손잡고 혹은 독자적으로 중남미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불법 비밀공작을 펴왔다고 폭로했다.1962년부터 78년까지 특전 부대에서 복무한 퇴역상사「류크·플로이드·톰슨」(48)의 진술을 토대로 엮어진 그린베레의 숨겨진 세계를 요약 소개한다.【 워싱턴=김건진특파원】
미 육군 특전 단, 통칭 그린베레부대는 1952년 창설됐다. 특공 작전과 군사첩보활동등 비정규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켄터키주출신인「류크·톰슨」이 그린베레훈련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9년, 군에 입대한지 9년째 되던 해였다. 아직 그린베레는 별다른 실적이 없는 소규모부대였지만 훈련만은 철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린베레는 노련한 고참 병사들만 뽑아 몇 년 씩 맹훈련을 실시한다. 훈련소에 들어온 병사 중 절반이상이 견디지 못해 중도 탈락하거나 최종심사에 불합격된다. 합격 필수조건 중엔 물론「능숙한 살인기술」도 포함돼있다.
CIA는 이미 50년대 말부터 해외비밀공작에 그린베레의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60년대와 70년대엔 동남아지역에서 수백 명의 그린베레요원들이 CIA가 지휘하는 작전에 참가했다.
또 최근 보도된 것처럼 80년 이란 인질구출작전 때는 서독에 주둔하고있던 그린베레요원 수명이 독일인으로 위장하고 테헤란에 들어가 작전준비를 돕기도 했다.
군사훈련과 전문분야로서의 의무병 훈련을 모두 마친「톰슨」은 61년 포트브랙 에 있는 제7특전부대에 배속된 후 곧 월남에 파견돼 월남인 비정규전투원의 훈련을 맡았다.
65년4월초「톰슨」은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활동하고있는 그린베레 비밀공작 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도미니카에선「프란시스코·카마뇨」대령이 이끄는 좌익게릴라와 정부군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처음엔 겉으로나마 중립을 표방했지만 4월말께 전세가 좌익 쪽에 유리해지자「존슨」대통령은 미국인보호를 구실로 해병대를 투입, 정부군을 도왔다.
「톰슨」들에게 미 해군 특공 요원들과 함께 게릴라지도자인「카마뇨」대령을 암살하라는 것이었다. 이들 육·해군 합동 공작 단은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있는 게릴라지도자들의 회합장소에 폭약을 장치해「카마뇨」를 폭사시키기로 했다. 미국인의 짓임을 숨기기 위해 작전 중 이쪽의 사상자가 나면 시체까지도 반드시 발각되지 않을 곳까지 운반키로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암살지령은 취소됐다. 이유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톰슨」자신은 그후 다시는 중남미에 갈 일이 없었다. 그러나「톰슨」은 그의 동료 그린베레 몇 명이 2년 후인 67년 볼리비아에서 남미의 대표적 직업혁명가「체·게바라」를 체포해 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당시의 국방상 및 정보기관 관계자들과 직접 암살에 가담했다는 전직 그린베레요원 한사람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톰슨」과 이들에 따르면「게바라」암살작전에는 파나마주둔 제8특전부대에 소속된 그린베레10∼12명이 가담했다. 67년말 이들은 CIA가 볼리비아 군에 실시하는 대 게릴라전 훈련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볼리비아에 파견됐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임무는「체·게바라」를 잡는 것이었다. 당시「게바라」는 볼리비아 산 속에서 좌익게릴라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린베레들은 수도 라파스교외의 병영에서 1백∼1백50명의 볼리비아 군 특전부대원들 을 훈련시키며「게바라」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볼리비아와 미국의 정보원들은「게바라」가 라파스 동쪽 깊은 산속 마을에 숨어있음을 확인했다. 그후 몇 주일 동안 그린베레들은「게바라」체포작전을 세밀히 짜면서 볼리비아 특전대의 정예요원들을 한 무리 뽑아 맹훈련 시켰다. 준비가 철저했던 만큼 체포작전은 쉽게 성공했다.
생포된「게바라」는 볼리비아병사들에 의해 현장에서 총살됐다고 작전에 참가했던 전 그린베레요원은 말했다.「게바라」의 시체는 캠프로 옮겨져 파나마에서 급히 날아온 2명의 미 정보원들에 의해 진짜임이 확인됐다.
도미니카 이후「톰슨」은 주로 동남아에서 활동했다. 월남·태국·라오스·캄보디아,그리고 월맹. 주임무는 첩보활동과 암살이었다.
월맹잠입은 전략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톰슨」자신은 4번 월북했으며 자기 말고도 수십 명이 이런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 국방성관리들은 미국의 월남개입초기에는 이처럼 미 병사들을 첩자로 올려보내는 수가 많았으나 점차 줄어 67∼68년께는 중단됐으며 대신 동남아인 용병들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동남아, 특히 월남에서 일하면서「톰슨」은 숱한 암살공작을 치렀다. 그린베레요원들은 아무런 주관적 판단 없이 지령에 따라 마치「이빨을 닦듯」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이게끔 됐다. 미국 쪽에서 볼 때 베트콩을 돕거나 동조하는 사람이면 정치인이건 직업인이건 지방유지 건 누구나 재거 대상이 됐다.
68년1월「톰슨」은 월남과 캄보디아 간 국경지대를 수색하는 기동타격대 에 배속됐다.
이 타격대의 그린베레들은 캄보디아인 들이 대부분인 3개 대대의 용병을 이끌고 캄보디아 영토를 멋대로 넘나들었다.
「닉슨」대통령이 월맹군을 쫓기 위해서란 빌미로 미군과 월남 군을 캄보디아영내로「공식」진입시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톰슨」은 72년 역시 CIA가 주관한 태국에서의 용병훈련에 참가한 후 곧 동남아를 떠나 귀국했다. 오랜 전장생활에 그는 극도로 지쳐있었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미국내의 그린베레기지에서 주로 훈련교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77 년 리비아사건이 닥쳐왔다.
그해 7월,「톰슨」상사는CIA요원을 자처하는「패트·루미스」란 사람의 전화를 받다. 그는「톰슨」에게 전직 그린베레요원을 몇 사람 모아서 해외에 나가 모종의 일을 해주면 보수를 두둑이 주겠다고 제안했다.CIA의 일이라기에「톰슨」은 일단 승낙했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특전 단의 군 요원들에게 이 사실을 신고했다.
이틀 후 정보원들은『고위층까지 확인한 결과 합법적인 일』로 판명됐다고 통고해왔다. 안심한「톰슨」은 휴가 원을 내고「루미스」와의 일을 진척시켰다. 불과 1주일 후「톰슨」은 3명의 전 그린베레들과 함께 리비아에 도착했다. 그들에 주어진 임무는「테러리스트들의 훈련」이었다.
훨씬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루미스」는 현직 아닌 전직 CIA요원이었으며, 역시 전 요원들인「프랭크·터필」과「에드윈·월슨」이 이끄는 국제 무기암거래조직의 일원이었다. 이 사건은 80년과 지난해에 큰 말썽을 빚었다.
「터필」과「월슨」은 리비아에 고성능 폭발물을 불법 반출한 혐의로80년 궐석 기소됐었다.
리비아사건의 검찰 측 중요증인이 된「톰슨」은 얼마후인 78년7월 육군상사로 퇴역했다. 그리고 4년만에 지나온 모든 일에 환멸을 느낀 그는「침묵의 계율」을 깨고 그린베레의 내막을 털어놓았다. 미국의 또 하나의 꺼풀이 벗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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