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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작가 강준식 씨가 본 「소련 속의 교포실태」(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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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63년께 인가 나도 북한엘 가려고 짐을 다 꾸려 놓골라서니, 생각해보니깐 두루…』
충청도출신의 배석도 씨(65)는 남북이 분단된 고국의 정치상황 아래서 오히려 북으로 갔다가는 더욱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북한 행을 포기했었다고 말했다. 사할린 들린스크시 외곽의 한 국영농장(콜호스)책임자로 일했었다는 배씨는 1974년 하바로프스크시로 이주해와 현재 비닐하우스의 자영농업을 하면서 살고있다.
『그때 안 간 것이 천만번 잘한 짓이여.』당시 사할린 교포들의 분위기는 북한선전에 속아 북한 행 선풍에 휘말리고 있었을 때였다. 먼저 북송된 교포들에게 북한당국은 주택과 세간살이, 그리고 반 년 분의 식량을 마련해놓고 극진한 대우를 해 주었다. 북한으로 간 교포들은 사할린을 다시 찾거나 혹은 편지로 자기들이 받은 대우를 사할린에 남아있는 교포들에게 이야기했다.
북한 공작원의 말이라면 반신반의할 교포들도 어제까지 이웃에 살던 철이 엄마, 순자 아버지의 말은 사실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북한의 계략이었다. 재일 교포의 북송 때도 써먹은 이 수법은 잘 먹혀 들어갔고, 그래서 많은 교포들이 50∼60년대에 북송되었다. 물론 한번간 교포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더러는 가족의 일부가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도 있다.
사할린 출신의 배씨는 북한에 유학간 자녀들이나 선전에 속아 북송된 가족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사할린의 옛 친구들을 이따금 만난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 들른 옛 친구들이 배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70년대 초부터 북한의 대 교포정책은 바뀌어 교포들의 북한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유학 갔던 그 친구의 아들은 오늘 어떻게 되었는가?『좌우간 밤새 통곡을 하는 거여. 유학 갔던 아들이 잘되었다면 울지를 안 하겠지? 그걸 보면 내가 안 가길 잘했어]
배씨는 매일 밤 한국의 해외방송을 듣고 있으며 북한은 싫어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배씨 같은 경우는 차라리 예외다. 실제로는 상당수의 교포들이 북한을 왕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은 가족방문. 남한 출신이라 하여도 지난 40년간 혼인 등을 통하여 북한에 혈연을 갖게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북송에 의한 이산가족도 있다.
더러는 북한에 연고자가 없어도 참담했던 50∼60년대의 궁핍생활 (스탈린 시대에는 정말 살기가 힘들었다고 교포들은 회고한다)을 극복하여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생겼으므로 관광을 목적으로 가는 교포들도 있다.
매년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속칭「계락단」이라는 이름의 북한방문관광단이 모집되고 있다.30∼40명 단위의 이 관광단에 끼어 들어 통상 30일간의 북한방문을 한다.
30일간의 방문 중 20일간은 판문점을 포함한 북한 명소 및 김일성 생가를 위시한 이른바「성지순례」에 할당되고, 나머지 10일간이 친족방문에 배정되는데, 이때 교포들은 김일성 동상 앞에 종이로 만든 거대한 화환을 여러 차례 바치도록 되어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윈수」의 고마움에 감격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바쳤다고 강조되는 이 조화헌납대금은 매회 북한 돈 50원 (한대 5만 원 가량) 씩이라고 평북출신의 김정신 씨(49·여) 는 말했다.
또 말끝마다 「지상낙원」을 이루고 있는 조국을 떠나 그간 비참한 외국생활에 얼마나 고생을 했겠느냐 면서 숫제 「소련 비렁뱅이」로 취급되기도 하는 소련교포들은 『조국이 특별 배려한』자동차로 안내됐으며 이때 돈은 받지 않았다고 했다.
김 여인은 친정에서 열흘을 보낸 뒤 다시 돌아갈 차편을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언니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국가가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고마운 차편을 끝내 불러주지 않는다.
『날씨도 좋은데 살살 걸어가자꾸나 』걸어서 가자면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거리라 김 여인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차를 불러달라고 하자 김 여인의 언니는 얼굴빛을 흐리며 내막을 실토했다. 김 여인 몰래 당국이 거둬간 차편 제공 값이 30원 이었으며 만일 또 차를 타게되면 60원의 그녀 월급을 몽땅 털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되면 다음 한 달 생계가 막연해진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 같은 「지상천국」의 게임은 밥상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보통 때는 한 달에 백미 1kg정도를 배급받는 가정이, 교포가 묵게되는 열흘간은 전 가족이 쌀밥과 고기를 먹게된다. 문제는 그 손님이 돌아간 뒤에 일어난다. 그 가정은 손님 먹은 몫까지의 쌀과 고기 값을 내야되기 때문이다. 세간사리도 마찬가지다.
72년부터 4번 북한에 갔다온 김 여인의 경우, 친정의 세간사리는 갈 때마다 모양이 달랐다. 이상히 생각한 김 여인은 그 번듯한 가구랑 TV등의 세간사리가 아무래도 눈 속임수처럼 느껴져 가구들에 관해 물어보았지만 언니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당원인 언니가 그 세간들에 대하여 열흘간만 빌려주었다가 빼앗아 가는 당국의 「임대」가구임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김 여인은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북한 정책은 바뀌었다.
아마도 김 여인처럼 자주 친정 집을 방문하는 교포들을 통해 이 같은 사실들이 발설되기 시각하자,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일단 설치한 가구는 그대로 남겨두되 값을 물리고 있다.북한 주민의 경제능력으로는 이 억지가구매매가 엄청난 부담임은 물론이다. 이런 내막을 알게된 교포들은 가구 값 등의 빚을 갚으라고 보통 1천 루불 (1백만 원) 이상의 돈을 주고 온다. 김 여인의 막내조카가 말했다.
『이모님, 거저 1년에 한번씩만 오시라요. 우린 부자가 되가시요.』
북한 당국으로부터 「준 비렁뱅이」로 가엾게 취급되기도 하는 소련교포들은 그러나 1년에 한번씩 북한을 방문하다간 진짜「비렁뱅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김 여인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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