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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선명하게…자연스럽게…영화 '디지털 화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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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영화 ‘청연’의 달라진 모습. 비행기를 새로 만들어 넣고, 하늘색도 더 푸르게 바꿨다.

▶ DI전문업체인 HFR의 직원들이 작업하는 모습. 안성식 기자

공포영화 '분홍신'의 김용균 감독은 디지털 기술의 덕을 톡톡히 봤다. 촬영을 마친 영화 필름을 스캐닝해 디지털 파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주인공 선재(김혜수)의 창백한 내면을 표현하려고 전체 색감(채도)을 뚝 떨어뜨렸다. 그런데 웬걸? 키포인트인 분홍신의 색깔마저 바래지 않는가. 순간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해결은 간단했다. 빛바랜 구두에 마우스를 대니 분홍색이 확 살아났다. 'DI(Digital Intermediate)'의 파워였다. 아날로그 필름으론 상상도 못했던 기술이었다. "멋진 걸, 세상 좋아졌네."

# 컴퓨터 그래픽(CG)을 넘어서=DI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충무로를 접수하고 있다. '디지털 중간물' 정도로 번역되는 이 기술은 편집이 끝난 필름을 고해상도로 스캐닝하고, 그 디지털 화면의 색상을 조절하는 걸 말한다. 충무로에선 흔히 디지털 색보정으로 불린다. 일단 '디지털 손질'을 거친 파일은 다시 일반 필름에 기록돼 극장에서 상영된다.

일면 단순한 것 같지만 요즘 영화계는 이 DI기술에 푹 빠져 있다. 웬만한 작품은 이 과정을 거친다. 평균 2억원가량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지만 작품의 때깔을 높이고, 까다로워진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는 데 이만한 작업도 없다. DI는 컴퓨터 그래픽(CG)에서 한 단계 나아간 기술이다. 따로 찍은 인물과 배경을 합성하거나('취화선'에서 장승업이 한양에 입성하는 장면), 200여 명의 병사를 일시에 수십만 명으로 늘리는('태극기 휘날리며'의 중공군 인해전술 장면) 등 주로 '없던' 장면을 새로 만드는 게 CG의 몫이라면 DI는 카메라 촬영분, CG 장면 등을 동시에 아우르면서 전체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어준다.

# 진짜처럼, 보다 자연스럽게= 연말 개봉 예정인 '청연'은 DI에 큰 신세를 졌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꼽히는 박경원(1901? ~1933)의 일생을 담은 '청연'은 한국.일본.미국.중국 4개국에서 촬영했다. 일제시대 사용된 복엽기가 미국에 남아 있어 비행기는 미국에서 촬영하고, 그가 훈련했던 비행학교는 중국에 세트를 지어 찍고, 실제 비행기 조종 장면은 한국에서 모형을 만들어 해결했다. 촬영지가 각기 다른 만큼 장소마다 조명.색상이 달랐다. 하지만 DI로 전체 색감을 균일하게 맞출 수 있었다.

DI는 '있는' 것의 재창조다. 자연스러운 영상이 1차 목표다. '튀는 것' '인공적인 것'을 솎아내고 '사실적인 화면'에 집중한다. 때문에 한눈에 들어오는 CG와 달리 DI는 관객들이 눈치채기 어렵다. 다음달 4일 개봉하는 '웰컴 투 동막골'이 그렇다. 한밤 동막골에 쏟아진 비에 비친 인공조명 느낌을 걷어내고, 카메라가 잘 잡지 못한 마을 너머 산을 부각시키고, 누렇게 퇴색한 잔디를 파랗게 되살리는 등등. DI는 필름에 있던 먼지나 흠집을 잡아내는 것은 물론 실수로 잘못 자른 필름을 깨끗하게 연결하는 '마법사'가 되기도 한다.

# 바쁘지만 행복해진 감독들=DI는 충무로의 '새로운 자식'이다. '화산고'(2000년)에 처음 도입됐지만 일반화된 건 최근 1~2년 사이다. '역도산' '남극일기' '태풍태양' '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장풍대작전' 등은 물론 향후 선보일 '친절한 금자씨' '형사' '태풍' 등 기대작들도 통과의례 비슷하게 DI를 거쳤다.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년), '아멜리에'(2001년) 등 미국.프랑스 등에서도 비교적 최근 도입된 기술이다.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은 "후반부로 가면서 감정이 고조되는 주인공의 성격을 화면의 붉은색을 높이며 표현했다"며 "DI가 만능은 아니지만 풍부한 색감으로 감독의 미학적 견해를 보다 편하게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DI전문업체인 HFR의 이용기 실장도 "단순 색보정을 넘어 감독의 연출.상상력 확장이 DI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DI의 활용 영역은 앞으로도 넓다. 동일한 디지털 소스로 청소년.성인용 등 다양한 판본을 제작할 수 있고, DVD를 위한 별도의 스캐닝 과정도 생략할 수 있다.'태극기 휘날리며'로 국내 DI기술의 자신감을 보여준 인사이트 비주얼의 강종익 대표는 "한국영화의 후반작업 역량이 크게 나아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완성도 높은 원본 필름"이라며 DI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영화 1편 디지털로 옮기면 DVD 260장 !

'달콤한 인생' '웰컴 투 동막골' '친절한 금자씨' 등의 DI를 맡았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 HFR에는 5억6000만원 상당의 DI 전문장비인 '베이스 라이트 4'가 있다. 디지털로 전환한 영화의 모든 장면을 최종 수정.저장하는 장치다.

두 시간 분량의 일반 영화는 디지털 용량으로 얼마나 될까. 평균 1.2 테라 바이트(1 테라 바이트=1024기가 바이트)에 이른다. 일반영화 DVD 한 장 용량이 4.7 기가 바이트인 만큼 단순 비교해도 '디지털 영화'는 'DVD 영화'의 260여 배에 이른다. 또 네티즌이 내려받는 불법 동영상(보통 CD 두 장, 총 1.4 기가 바이트)의 870여 배 분량이다. 극장 상영 필름에 버금가는, 아니 보다 높은 해상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보안 문제. 파일이 워낙 커 복사가 어렵지만 DI장비는 해킹 방지를 위해 인터넷과 연결하지 않는다. 원본 필름을 스캐닝하고, 또 완성된 디지털 소스를 상영용 필름에 옮기는 데 각각 1주일 정도 걸리니 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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