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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반민특위(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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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9면

반민특위의 경찰간부 구속은 끝내 특위와 경찰의 정면충돌이란 비극적 사건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경찰이 반민특위를 급습한 것이다.
건국 10개월만인 49년6월6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경찰의 특경대 해산」으로 그 성격을 좁혀 수습된다. 그러나 실상은 행정부와 국회의 충돌로 행정권의 「힘에 의한 통치」라는 전례를 남김으로써 불행한 헌정의 서막이 되었다. 사건 내용으로 거슬러 가보자.
경찰은 서울시경 최운하 사찰과장과 종로서 조응선 사찰주임의 구속은 보복이며 어쩌면 공산당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몰아붙였다. 세 의원의 남로당 관련사건 수사책임자인 최 과장의 구속은 국회 내 남로당 푸락치사건 수사를 방해하려는 좌익의 음모라는 논리였다.
경찰은 서울시경산하 경찰간부의 긴급회의를 통해 3개항을 결의했다. △최 과장 등의 즉시 석방 △경찰관의 신분보장 △반민특위 특경대 해체가 그것. 이들은 이 3개항이 48시간 내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원 사직하겠다는 결의문을 작성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런 경찰의 동요를 이유로 장경근 내무차관·이호 치안국장 등은 최 과장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경우에 따라선 경찰이 실력행사를 하게되는 불행한 사태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 경고는 6월6일 실행에 옮겨졌다.
서울 남대문로2가 반민특위본부는 중부서장 윤기병 총경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출동, 특경대원을 비롯한 반민특위 요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무기, 서류, 자동차, 피의자를 고문한 각종 증거물품을 압수했다. 다른 경찰서도 관내의 특위요원 자택을 급습, 요원을 연행하고 가택수색을 했다.
이날 출동경찰들은 특별검찰부로 나온 권승렬 검찰총장을 무장 해제시키고 특위위원인 국회의원도 일시 연금할 정도로 살벌했다. 경찰은 22명의 특경대원을 포함해 35명의 요원을 연행해갔다. 경찰의 습격도 난폭했듯이 조사도 거칠었다. 경찰은 비위사실조사를 이날 중에 끝내라는 지시에 따라 신속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이 결과 20여명의 특경대원은 모두 l주일에서 1개월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부상을 당했다.
본회의 도중 사건을 보고받은 국회는 매우 긴장했다. 즉시 대통령과 전 국무위원 출석요구를 결의했다. 신익회 등 의장단과 내무·국방 두 위원장 등 5명의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대통령은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러곤 『내가 몸이 불편해 국회에는 나갈 수 없다. 특경대를 해체했다해서 특위업무에 지장은 없을 줄 안다』라고 가볍게 받아넘겨 국회대표의 입을 막아버렸다.
하오에 속개된 국회본회의는 각료들을 상대로 책임을 추궁했다. 의원들은 「경찰의 쿠데타」(노일환 의원 발언)라고 규정, 그 책임을 따졌다. 이에 대한 정부답변.
▲이범석 총리=이번 일은 특경대에 대한 것일 뿐 반민특위에 대한 것은 아니다.
▲장경근 내무차관(김효석 장관이 입원중이어서 대리출석)=특경대가 경감·경위 등 경찰직급을 붙여 경찰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불법행동이어서 해산을 권고했으나 묵살당해왔다. 더이상 유사경찰단체의 불법을 용인할 수 없었다.
불법을 제거키 위해 경찰권을 행사한 것인데「경찰의 반란」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사건을 놓고 국회와 정부는 정면대결로 밀려가고 있었다.
사실 그 무렵 정세는 정부가 반민특위에 실력으로 제동을 걸 수 있는 조건들이 성숙해 있었다. 행정부의 동요, 반민특위의 기준없는 일처리, 그리고 국회내의 분열 등이 그 배경이다.
당시 행정관리는 총독부관리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찰의 경우 그 당시의 통계는 없으나 건국12년이 지난 60년의 통계에 의하면 총경의 70%, 경감의 40%, 경위의 15%, 경찰전체의 30%가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이로 미뤄 건국 초의 경찰은 최소 50%이상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관료들은 또 국회 안의 제1세력인 한민당과 연결돼 있었다. 그 증언.
▲임문환씨(초대 상공차관·현 부산플라자호텔 회장)=해방된 45년 겨울 상해임시정부의 신익회 내무부장은 귀국 후 행정연구반을 편성했다. 멤버는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총독부관리로 지내다 쉬고있는 사람들이었다. 대상자중 두 사람이 제외됐는데 한사람은 모친이 일본인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부친이 한일합방의 공로로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행정연구반은 그해 3개월의 작업끝에 건국후의 행정지표를 작성해 제출하고 해산했다.
그후 새 정부가 서면서 모두 중용되었다. 나는 상공차관을 맡게됐는데 본부 국·과장 등은 한민당의 추천을 받아 기용했다. 당시만 해도 행정관리들은 한민당의 영향권아래에 있었다. 또 임정요인들까지도 새 정부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일제하의 관리를 중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알고있었다.
이 증언이 시사하듯 총독부관리들은 미 군정―상해임시정부―새 정부―한민당에 의해 이미 중용되고 있었고 행정의 중추가 돼있었다. 자연 이들 관료들은 국회 반민특위의 압력이 다가오자 몹시 반발해 한민당에 압력을 가했다.
국회도 한민당 등 보수파와 소장파그룹의 대립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마침 반민특위는 소장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자연 국회 내 보수파의 소장파 견제는 반민특위에 대한 압력으로 나타났다.
반민특위 역시 그 운영에서 모순을 쌓아갔다. 재판부와 검찰은 자주 충돌했다.
특경대의 권력남용이 사회문제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잡음과 압력 때문에 특별재판부 재판관이던 김장렬·홍정옥 의원 등은 5월말 재판관직 사표를 내고 물러나 있었다. 결국 정부로선 예비작업을 끝낸 뒤의 실력행사였다. 그럼 반민특위 습격은 누가 지시했을까.
▲김태선씨(당시 서울시경 국장)=경찰간부의 구속으로 경찰이 동요해 사태가 심각했다. 나는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중이던 김효석 장관을 찾아갔다.
장경근 차관·이호 치안국장도 동석했었다. 김 장관은 경찰 2개 중대로 마포형무소를 쳐서 최 과장 등을 빼내오라고 했다.
김 장관이 경찰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속셈이 엿보이는 제안이었다.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고 찬성을 하고 대신 경찰이 형무소를 칠 때 헌병이 출동 않겠다는 것과 검찰의 양해 두 가지를 사전에 받아달라고 했다.
이래서 장 차관과 이 국장이 각각 국방부와 검찰을 방문해 양해를 구했는데 예상대로 모두 실패였다.
나는 다음날 내 책임아래 시내 전 경찰서장과 시경 과장단을 소집하고 6일 상오7시를 기해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했다.
나는 작전이 끝나자 곧바로 전 경찰력을 동원해 비행조사를 오늘중 끝내라고 지시했다. 자정이 가까와오자 수사결과가 보고되기 시작했는데 「무기불법소지」 「남로당 관련자」 「뇌물받은 자」등이 드러났고 불온문서도 나왔다. 나는 이 수사보고서를 갖고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넣어 말썽을 일으켰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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