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①정치] 5. 87년 6월 민주항쟁의 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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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987년 역사의 신은 드디어 한국에 민주주의를 허락하기로 결심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4월 13일 호헌을 천명했고, 일부 야당세력은 내각제 개헌을 타협하려 했으나 결국 6월항쟁의 도도한 물결은 정권으로부터 6·29 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한 번 터진 민주화의 물결은 급류였다. 대선 선거운동의 혼돈이 있었고 쿠데타 모의도 있었지만 결국 5년 임기의 직선제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민주화의 실습은 공짜는 아니었다. 한국은 노조·학생 등 각계의 분출된 요구로 극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한열
1987년 6월 9일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군을 이종창군이 껴안고 있다.


최루탄
6월 항쟁 중 방독면을 쓴 경찰이 농성 시위 학생들에게 총류탄 발사기로 SY44 최루탄을 발사하고 있다.


돌파구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1987년 6월 29일 당 중앙집행위 회의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화
6·29 시국수습안이 발표된 날, 환한 표정으로 중앙일보를 읽고 있는 시민들.

“내가 껴안았던 한열이가 역사를 바꾸었다”
그 날 이한열 부축했던 이종창씨

▶ 연세대 도서관 직원이 된 이종창씨

역사적 드라마에는 항상 우연한 계기로 전면에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1987년 6월 연세대 도서관학과 2학년이던 이종창(아래 사진)씨도 그런 경우다. 그해 6월 9일 이씨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연세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순간 정문에서 교내 쪽으로 약 5m쯤에 뭔가 쓰러져 있는 물체를 보았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해 분명하진 않았지만 사람 같았다. 이씨는 달려가서 그를 안아 일으켰다. 한국현대사에서 유명한 장면(위 사진)이다. 이 사진은 국민의 마음에 불을 댕겼고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씨와 한열이는 전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장면은 더욱 극적이다. 이씨는 지금 39세이며 11세, 10세인 두 딸을 두고 있다. 그는 핵심 운동권은 아니었고 졸업 후에도 생업을 택했다. 그는 연세대 도서관 직원으로 일한다. 요즘엔 도서관 신설 업무에 매달려 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언론은 그를 찾곤 했다. 그러나 그는 피했다. 그저 자신이 우연한 기회에 역사의 한 부분이 된 것으로 그치는 것이지 더 요란하게 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한열이 사건은 일반인들에게는 거대한 역사만으로 다가가지만 한열이의 가슴을 끌어올렸던 그에겐 ‘한 인간의 죽음’이 추가되는 것 같다.

“일반인들은 6월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계절로 기억하겠지요. 하지만 저에겐 한 가지 기억이 더 있어요. 한열이가 내 앞에서 숨져 간 것 말입니다. 그 때 생각을 하면 항상 힘듭니다.”

이씨는 “6월항쟁 덕분인지 시대가 변한 것은 다행”이라며 “이제는 당시와 달리 할 수 있는 얘기는 마음껏 할 수 있지 않으냐”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용호 기자

그 때 중앙일보
박종철 고문 치사 특종

“경찰들 큰일 났어.”

1987년 1월 15일 오전 9시50분쯤. 혼자서 어느 검찰 간부의 방에 막 들어섰을 때 그가 내뱉은 말이다.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상대의 경계심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게 말입니다”고 맞장구를 쳤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 친구 서울대생이라며.”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박종철군이 고문을 당해 죽은 것이다.

이후 1시간30여 분 동안의 숨막히는 추적 끝에 박군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오전 11시30분쯤 ‘언어학과 3년 박종○’까지 확인했고, 서울대 출입기자가 학적부에서 이름을 찾아냈다. 낮 12시쯤 돌아가던 윤전기를 세워 사회면 2단으로 보도했다.
5공 정권은 크게 흔들렸고 이어 역사는 6·10 항쟁으로 굽이쳐 흘러갔다.

신성호 논설위원

87년 12월에도 쿠데타 망령이…

한국현대사에서 마지막 쿠데타는 1979년 12·12로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쿠데타가 또 일어날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12·12가 ‘마지막’이 안 될뻔한 일이 있었다. 87년 6월항쟁으로 쟁취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그해 12월초, 대선의 극심한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추진한 군부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혼란의 요인이 있었지만 핵심은 나라를 쪼갤듯한 지역감정이었다. 영남에서 유세를 하는 김대중후보, 호남에서 연설을 하는 노태우·김영삼후보에게는 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후보가 피투성이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부 강경파 군부그룹 내에서는 “더 이상 방치하다간 김일성에게 나라를 뺏기겠다”는 정세판단이 등장했다고 한다.

쿠데타 모의를 증언하는 이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민정수석이었던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는 “12월 초 군부 주요 인사로부터 ‘선거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쿠데타 주도세력은 수도권 부대의 준장·대령급 인사 10여 명이었고 김 의원의 육사동기인 17기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노 3김’은 물론 전 대통령도 구금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김 의원은 “이를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릴 것이고 그러면 사실상 선거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돼 내가 조용히 군부인사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김 의원은 “모의 주동자들을 만났으나 완전히 설득하지 못해 초조한 시간을 보냈는데 며칠 후 쿠데타 모의를 접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들은 내가 감지한 사실을 알고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김 의원은 누가 주도했으며 어떻게 병력을 동원할 계획이었는지 등등에 대해선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육사 17기의 K장군을 거론하기도 한다. 당시 군부에 있었던 인사들 사이에선 “쿠데타 세력 내부에 노태우 후보와 통하는 사람이 있었고 모의를 눈치챈 노 후보가 쿠데타 주도 세력을 설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신용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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