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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백두산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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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상식과는 달리 백두산에 관한 과거 기록은 흔치 않다. '삼국사기' 등 오래된 사서(史書)에 백두산의 존재가 보이지만 그것에 지금처럼 거창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백두산이 적극적으로 의식돼 기록으로 남은 것은 조선 숙종 38년(1712) 청과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정계비를 세우면서부터일 것이다. 이때 조선 협상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청의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천지에 올랐던 수행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이 쓴 '북정록(北征錄)'이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공무의 결과로 인해 남긴 사료에 가깝다.

원시림 지대를 뚫고 구경삼아 백두산을 오르는 것은 보통 사람이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천지의 물에 손을 씻은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별난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경성군(鏡城郡)의 선비 박종(朴琮, 1735~93)은 1764년 5, 6월 사이 백두산을 답파(踏破)하고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을 남기고 있다. 꽤 긴 작품인데 천지를 묘사한 부분을 거칠게나마 읽어보자.

'정오에 산꼭대기에 올랐다. 순간 높은 절벽이 사위(四圍)에 솟고 바위 봉우리가 숲처럼 열립(列立)하여 병풍처럼 펼쳐진 것이 마치 큰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듯하였다. 그 가운데 큰 못이 있는데, 천 길 아래로 푹 꺼져 흡사 항아리 속에 담긴 물과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퍼렇게 깊은지라 잴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마치 저 땅 속의 큰 구멍과 통해 있는 듯도 하였다. 수면에는 얼음이 살짝 끼어 있었고, 얼음이 갈라진 곳은 겨우 4분의 1 정도였다. 그 빛깔은 푸른 유리 같고 돌 무늬가 영롱하였으며, 사방의 경치가 비치어 얇은 얼음이 마치 거울 같았다. 때로는 그 빛깔이 푸른색이 되었다가 검은색이 되었다 하였는데, 대개 빛을 머금고 흘러가는 구름 조각이 비춰 그 빛깔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천지의 묘사가 퍽 아름답지 않은가. 박종은 천지에 올라 보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한데 모인다 하였다. 지금 사람이라 해서 무엇이 다르랴. 뒤에 몇몇 문인이 백두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기지만, 거기서도 백두산은 그렇게 무거운 무게로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聖山)이 되는 것은 근대 민족주의의 시작과 함께다. 대체로 20세기 초반부터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다. 육당은 백두산을 '동방 문화의 최요(最要)의 핵심, 동방 의식의 최고 연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후 좌파든 우파든, 그 내부 주장의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민족의 운명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백두산이 민족의 발상지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이든 북이든 다 같이 백두산이 민족의 발상지요, 개국지(開國地)라고 가르쳤던 것도 공지의 사실이다. 백두산은 20세기에 들어 그야말로 민족의 성산이 되었고, 분단 이후 '한라에서 백두까지'는 한민족 통합의 거대한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이 되는 과정을 추적하면 한국 민족주의가 성립하게 된 역사를 캐낼 수 있다. 그 결과 민족주의는 만들어진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덮어두자. 백두산이 민족의 상징이 된 것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한이 백두산 관광을 허가했다고 한다. 이제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남북 간의 긴장 완화, 나아가 통일로 가는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갑기 한량없는 일이다. 덮어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약력=성균관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저서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