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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9)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57)|김영기|김덕팔·최성갑·이금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기수가 링을 떠난 뒤 미들급에선 김덕팔·최성갑.·이금택 등 이 짧은 기간 반짝하다 사라진다.
특히 김덕팔은 동양에선 처음 라이트 헤비급 선수로 활약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지만 좋은 결과를 남기지는 못 했다.
아마에서 동양 최강의 철권을 자랑하던 김덕팔은 김기수가 한참 돌풍을 일으키던 67년 9월에 프로로 데뷔했다. 그는 아마 시절 62년 자카르타와 66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1백19승3패의 화려한 전적을 쌓았었다.
따라서 프로에 뛰어든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으며 그 역시 초반 스타트는 쾌조를 보였다. 데뷔전에서 일본의「다까다」를 3회 KO로 누른 뒤 5연속 KO승을 기록하는 파 죽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미들급으로 뛰고 있었지만 창상 체중조절로 고심했다. 그는 평상시엔 체중이 80kg으로 한계 체중(72·5kg)을 7∼8kg 웃돌아 시합을 앞두고 훈련보다도 항상 감량이 더 큰 문제가 쨌다. 결국 감량 싸움이 원인이 돼 경기 중 링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68년 6월 김덕팔은 장충 체육관에서 일본의「후지」를 맞아 논타이틀 10회전을 벌이게 됐다. 5연속 K0승을 올린 김덕팔은 무명의「후지」안면에 특기인 스트레이트를 퍼부어 몇 회 KO승이냐 만 남은 것 같았다.
무더위 속에 체육관을 찾아온 관중들도 이제나저제나 KO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후지」는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끈질기게 버텨 나갔다. 마지막 10회에 들어 판정승으로 끝나는구나 하는 순간 해 괴(?)한 일이 벌어졌다. 1분30초쯤 지났을 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김덕팔이 갑자기 링에서 내려오더니 래커 룸으로 달려가고 만 것이다. 이 돌연한 사태는 수천 관중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후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는 이 경기를 앞두고도 감량 고에 시달렸다. 이 날 아침 계체량에서 힘들게 한계 체중을 통과한 그는 갑자기 닭찜이 먹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것이 탈을 일으키고 말았다. 허겁지겁 한 마리를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는데 이것이 체하고 만 것이다. 컨디션이 안 좋은 채 링에 오른 그는 잘 싸워 나갔으나 9회에 들자 체한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10회에 경기도중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래커 룸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해 9월 그는「후지」를 다시 불러들여 판정승을 거눴으나 체중은 더욱 불어 미들급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이어 1개월 후인 10월에 그는 필리핀 웰터급 챔피언이었던「알리파라」와 논 타이틀전을 갖게 됐다.「알리파라」는 김기수에게 판정패했으나 다운 한 번 안 당한 강자였다. 양측은 한계 체중을 미들급보다 1kg 오버되는 73·5kg으로 결정했다. 그런데도 그는 개체 량까지 1kg이 넘는 74·5kg에서 도저히 더 줄이지를 못했다.
결국 김덕팔은 링에서 내려간 사건과 함께 성실치 못하다는 이유로 한국권투위원회로부터 6개월간 출전 정지를 당했다. 그리고 대신 펀치히터로 나선 선수가 전남 해남의 씨름 장사 출신인 최성갑이다. 최는 이 대전에서 7회 KO승을 거두어 일약 호프로 등장하게 펐다.
김덕팔은 69년 봄 징계가 풀리면서 드디어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4월에 WBA 8위인 미국 흑인「처크·레슬리」와 첫 경기를 가는데 시종 열세를 면치 못한 끝에 판정패했다. 이 6월에 흑인 복서「에디·포레트」와 2차 전을 벌였으나 역시 역부족 어, 3회에 TKO패했다. 그는 결국 이 해에 현역에서 물러나 트레이너로 변신했다. 70년부터 유제두와 콤비를 이뤄 결국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유가「와지마」(일본)에게 타이틀을 다시 잃은 뒤 엉뚱하게 약물 중독을 발설, 트레이너인 김덕팔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74년부터 한국화장품 권투부 대표 사범으로 아직도 권투 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핀치히터로 나서 행운을 잡은 최성갑은 69년 9윌 27일 장충 체육관에서 일본의 신예「에또」(21·동양 미들급 4위)와 동양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을 벌여 판정승, 새로운 챔피언이 됐다. 6척 장신인 씨름 장사 최는 힘은 당할 자가 없었으나 방어가 허술, 복서로서 대성을 하지 못했다. 당초 김기수는 타이틀을 반납하면서 타이틀 결정권의 프로모터 권을 차지했다.
또 김기수는 이 외에도 승자는 60일 안에 이금택의 도전을 받도록 소위 옵션(이면 약정)을 맺는 등 결국 꿩 먹고 알 먹기로 수익을 올렸다. 최는 70년 1월10일로 예정된 이와의 1차 방어전에 앞서 69년 12월5일 동양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한국계「가네자와」(일본)를 불러 들여 논 타이틀전을 벌였으나 뜻밖에 3회 KO패로 충격파를 던졌다.
이 같은 상황 아래 벌어진 1차 방어전에서 최는 이의 끈질긴 인파이팅에 눌려 판정패해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금택 역시 꼭 1년 뒤인 71년 1윌6일 동경에서 열린 1차 방어전에서 흑인 혼혈아「캐시어스·나이토」에게 판정패로 타이틀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뒤 이는「나이토」를 6회 KO로 누르고 타이틀을 뺏은 유제두에게 두 차례 도전, 판정패와 3회KO패한 뒤 72년 링을 떠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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