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안쓰러운 北대사관 개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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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낮 12시 화창한 봄햇살이 나른하게 비치는 영국 런던의 주택가 일링 지역. 평범하고 평화로운 동네가 시위대의 함성으로 소란스러웠다.

북한이 영국과의 수교 이후 2년5개월 만에 대사관 문을 여는 경사스러운 날인데,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복장에 흰색 마스크를 쓴 20명 가량의 시위대(기독교인권단체 소속)가 들이닥친 것이다. 시위대.보도진과 경찰이 에워싼 담장 안쪽 마당 한가운데, 개관 파티에 참석할 손님을 맞기 위해 서 있는 북한 공관원의 표정은 데스마스크처럼 굳어 있다.

대사관이 문을 열기까지의 과정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일링 지역은 시내에서 전철로 40분 가량 떨어진 주택가. 외교 공관이 들어설 자리는 아니다. 외교 공관은 거의 모두 시내 중심에 있다. 북한이 이곳을 택한 것은 부족한 예산 탓으로 알려졌다. 공관 개설이 늦어진 배경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대사관은 1백30만파운드(약 24억원)에 구입한 방 7개짜리 2층 단독주택이다. 대리대사를 포함해 공관원 3~4명이 가족과 함께 모두 이 집에서 살 예정이다. 때문에 문패도 '사무실'로 못 내고 '주거 및 사무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해야 했다. 그나마 시내에서 그만한 공간을 구하려면 몇 배의 예산이 든다.

원칙 따지기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일링 구청에선 이미 "주거용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집안이 안 보이게 담장을 높이 쌓은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주거용이기에 대사관에 당연히 걸려야 할 국기(인공기)도 일년에 몇 번밖에 걸지 못한다. 북한은 당분간 구청을 상대로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지루한 협상을 벌여야 할 듯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이날 가장 중요한 하객인 영국 외무부의 빌 러멜 국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에 핵개발 포기를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과 항의로 해석된다. 런던의 북한대사관은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차지하는 위상과 처지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 같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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