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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5)제77화 4각의 혈투 60년(53)|김영기|첫 세계챔피언 김기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66년 6월25일. 민족의 비극인 6·25동란 16주년 날이다. 그러나 이날이야말로 세계로의 웅비를 꿈꾸던 한국 프로복싱이 마침내 찬란한 꽃을 피운 역사적인 기념일이다.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며 그 영웅적인 주인공이 김기수다.
밖에선 폭우가 쏟아져 초여름 밤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6천5백 여명의 관객이 입장한 장충 체육관은 기대와 흥분으로 열기를 뿜었다.
세계주니어미들급 타이틀매치의 공이 올렸다. 챔피언은 60년 로마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이자 그때까지 패배를 모르던 이탈리아의 영웅「니노·벤베누티」.
l라운드.「벤베누티」는 경쾌한 푸트윅과 함께 레프트 잽, 라이트스트레이트에 이은 흑과 어퍼커트 등을 다채롭게 구사, 챔피언답게 여유를 보였다. 사우드 포인 김기수는 발이 느리나 쉴새없이 헤드 웍, 보디 웍을 쓰면서「벤베누티」의 가격을 모조리 피했고 라이트 잽과 레프트 흑의 기습으로 응수했다.
2라운드에서도「벤베누티」는 찬스를 잡지 못했고 김기수는 라이트 잽과 레프트훅의 콤비 불로가 호조, 점수를 땄다.
3, 4라운드 들자 김기수는 자신을 얻은 듯 더욱 과감한 접근 전을 거듭,「벤베누티」를 코너로 몰아넣고 강한 좌우 훅을 연타했다.
이후「벤베누티」는 실점을 의식, 맹렬한 공격을 꾀했으나 김기수는 영악하게도 정면 격돌을 회피, 잦은 클린치로 불리한 상황의 봉착을 교묘히 예방했다. 7라운드까지 호각을 이룰 수 있었던 김기수의 두뇌 작전이었다.
초조의 기색을 드러낸「벤베누티」는 9라운드부터 KO를 노리고 사력을 다 했으나 오히려 10라운드에서 김기수의 라이트 혹 한방을 정통으로 맞고는 코피가 터졌다.
김기수는 관중의 열광 속에 용기 백 배, 11, 12라운드에서도 치고 빠지며 때리고 껴안는 소위「히트 앤드 런」그리고「히트 앤드 클린치」작전으로 계속 점수를 보탰다. 대세는 도전자에게로 기울어졌다.
13라운드부터「벤베누티」는 총공세,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김기수는 얄미울 정도로 밖으로 돌거나 클린치를 거듭하는 소극 전으로 시간을 끌었다.
숨막힐 듯한 불안과 흥분을 뿜어낸 열전 15라운드가 마침내 끝났다.
한국 관중의 눈에는 분명히 김기수의 승리였다. 환성을 울렸다.
그리고 판정도 역시 김기수의 승리를 선언했다 .주심「포브」(미국)가 74-68, 부심 정영수(한국)가 72-69, 부심「기라르디」가 68-72로 채점, 2-1의 김기수 판정승이었다.
장충 체육관은 물론 TV를 시청하던 전국의 국민이 환호하는 가운데 김기수는 세계 주니어미들급 제4대 챔피언으로서 세계의 정상에 군림했고 한국 프로복싱은 50년의 연륜 위에 비로소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흥분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 가운데 김기수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축하의 악수와 함께 챔피언벨트를 받았다.
하루를 쉰 후 27일 하오6시20분부터 약 1시간 동안 김기수는 코치인 미국인「브비·리처드」, 매니저 장기섭 등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서울시청∼종로∼퇴계로∼서울시청으로 수십만 시민의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축하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그칠 줄 모르고 어수선했던 사회분위기 속에 김기수의 쾌거는 참으로 오랜만에 고귀한 청량제였으며 김기수는 일약 청소년의 우상으로 머물렀다.
챔피언십 탈취까지 성공시킨 이 역사적인 이벤트는 1년 전인 65년부터 추진됐다. 김기수가 그해 1월일본의 해진문웅을 꺾고 동양미들급 챔피언이 된 약 5개월 후 WBA랭킹위원장 「페더럴·렐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당시 김기수의 매니저 유종배와 동양권투연맹 박순철 사무국장이 도일, 교섭을 벌였다. 이때 김기수는 WBA 랭킹 10위에 턱걸이하고 있었으므로 세계 도전을 위해선 랭킹을 6위 이상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이 교섭이 주효, 66넌3월에 6위로 껑충 뛰었고「벤베누티」와의 대전계약이 이탈리아주재 대사관을 통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기수의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던 당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뒷받침이 켰다.
「벤베누티」는 60년 로마 올림픽 때 웰터급 경기 초반에 김기수와 첫 대면하여 판정승, 김기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승리를 확신하고 한국 측의 당시로선 파격적인 5만5천 달러 개런티와 일행의 교통·숙식비 일체 제공이라는 좋은 조건(총 경비 1천8백여 만원)을 쾌히 응낙, 적지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거기 서울이 무덤이었고 생애 최초의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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