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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제자·철농 이기우>|「반민특위」(7)|국정의 본산 세종로1번지 34년…명멸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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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민특위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의 모습은 갖가지였다. 이래서 때로는 슬픔이, 때로는 분노가 방청석을 휩쌌다.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한 민족적 비극은 당대의 지성이랄 수 있었던 최남선·이광수, 그리고 최 린씨 등의 법정에 선 모습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정 정면의 태극기를 중앙에 두고 한족엔「민족정기」라고 쓴 오세창씨의 휘호가 걸리고 다른 한쪽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그 선언서엔 휘호를 쓴 오세창의 이름, 그리고 민족배반의 피고로 선 최린의 이름이 33인의 이름 속에서 유난히 크게 눈에 띄었다.
함남 함흥 출신인 최린씨는 청·장년시절을 항일민족운동에 몸 바쳤다. 그는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에서 헌법과 재정학을 가르쳤고, 3·1운동 때는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출옥 후 몇 년의 은둔생활 끝에 34년 중추원 참의를 받아들인 이래 10년간 일본군국주의 협력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독립운동>
그는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사장을 지냈고 천도교 대표로 비행기를 헌납했으며 45년5월엔 매일신보에「2천6백만 조선인은 대동아 전쟁에 돌격하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나름대로 민족보전이라는 자기합리화의 구실이 있었다지만 조국광복에 헌신했던 학자의 양식과 민족의 긍지를 버리고 반역의 낙인을 걸머진 과오를 진심으로 참회했다.
-27세 때 황실의 특파로 동경 제2중학에 입학한 사실이 있는가.

<그렇다.>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다 퇴학당한 사실이 있는가.

<보지신문에서 조약기사를 읽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피고의 정치사상은.

<특별한 이상이야 없지만 기미독립운동까지는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했고 둘째 단계로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 폈을 때 일본에 들어가 동태를 살폈고 민족보전을 생각했다.>
-3·1운동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죄를 진 나 같은 놈은 죽어도 한이 없다.>
최씨는 심리를 마치고 돌아서면서<이렇듯 수많은 방청석의 동포들 앞에서 내가 뭐라고 또 입을 열겠는가. 빨리 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달라>라며 눈물을 흘렸다. 72세의 노인이던 최린씨가 그의 과오를 시인하며 울먹이던 모습은 지식인의 나약함을 표 상하는 듯해 방청석을 침통하게 했다.
이와는 대조를 보인 이가 이 나라 신문학의 개척자였던 이광수씨. 그는「성전의 용사로 부름 받은 그대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로 시작되는 시까지 써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펼쳐 놓은 전선으로 우리 청년들을 내몰았다. 이 일에 대해 그는 학병에 나가는 것이 학병을 기피해 당하는 고통보다 덜할 것 같아 이렇게 권유 했 노라는 구차한 변명을 고백서에 담아 그의 재능을 아끼던 민중을 슬프게 했다.
그러나 보다 큰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은 애국지사를 체포, 고문한 반역아들. 그 동안 집요하게 반 민법을 몰아치던 이종형은 재판에서조차 무모하게 느껴지리 만큼 오만했다. 그의 반역 혐의는 와세다 대 출신으로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에 참여해 12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출옥 후 전향했다.
△1930년부터 일본관속군의 밀정이 되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위장해 길림성의 중국군벌에 접근했다. 그리곤 공산당 토벌이라는 구실아래 이곳의 한국인 애국지사 50여명을 체포, 그중 17명을 죽이거나 투옥했다. △31년 이곳의 한국인과 만주 인이 충돌한 만보 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씨는 이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장춘 지국 장 김이삼 씨를 일본의 앞잡이로 없었던 사건을 조작해 보도했다고 우겨 총살했다는 것 등.
그날의 심문내용.
-기소사실을 묻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빨갱이다" 역습>

<나는 기소사실의 근본부터 반대한다.>
-묻는 말에만 순서대로 답변하라.

<순서대로 라니? 공산당을 토벌했다고 재판하는 이 법정에서는 나는 재판을 못 받겠다. 타도하였다고 받는다면 여기 앉아 있는 재판장 자신이 받아야 될 것이다. 이동령 선생이 애국자인데 그의 아들인 너 이의식이가 너의 아버지 못지 않은 나 같은 애국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없다. 김일성 법정이 아닌 법정에서 나를 심판한다고.>
-사실대로만 말하라.

<석오(이동령의 호)자제인 검찰관이 나에게 학살 운운하였는데 도대체 학살이란 어디서 가져온 말인가. 조서를 작성할 때도 그런 말을 안 했는데.>
-학교를 나온 뒤에 무얼 했나.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이라니.

<만주벌판에서 굶주린 우리 동포들과 나라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조서에 옥중에 2년 동안 있었다는데.

<기미운동당시 12년 징역형을 받고 9년 동안 함흥에서 복역했다.>
-범죄내용은.

<종로 서에서 일본 놈 순사 두 명을 때려죽인 죄로 형을 받았다.>
-그후에는.

<만주 길림에서 마침 공산당이 난을 일으켜 잔학한 행동을 하기에 장학량(중국장성으로 길림주둔군의 장군)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사령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 공산당 놈들은 자기아버지도 학살하고 주의사상에 정신을 잃을 때였는데 바로 이것이 해방 후 내가 대동신문을 경영할 때와 흡사하게 만주벌판도 새빨갰다. 이런 분위기에서 투쟁한 애국자가 오늘 자리에 나설 하등의 필요가 없다.>
-그후에는.

<8년 전 아내인 이취성과 결혼하여 대련서 수박장사를 해 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재판장이 폐정을 선언하자<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자들은, 내가 백일하에 풀리는 날, 나를 이와 같이 모함한 한민당·빨갱이·중간회색분자를 토벌하겠다>고 했다. 간수가 쇠고랑을 채우려 하자<내 가슴에 훈장은 달아 주지 않고 내 손에다 쇠고랑을 채워 주다니>라며 가슴을 치는 등 앙탈했다.

<강우규 선생도 고문>
철면피의 표본은 고등계 경찰을 지낸 평남출신 김태석씨. 한성사범·일본대 법대 2년 수료의 학력을 가진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1912년 경찰로 옮겨 23년 한국인으로선 경찰 최 고위직인 경시(총경)로 승진, 그후 일반관서로 옮겼다가 40년이래 중추원 참의를 맡고 있었다. 체포당시 67세이던 김씨에 대한 고발내용은 29년 서울에 부임해 오던「사이또」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선생의 체포, 고문을 비롯해 국내 항일단체의 소탕과 애국지사의 고문 등 가장 악랄했던 민족반역자 순사였다. 궤변으로 시종한 심문내용.
-경찰에 들어간 동기는.

<내가 다니고 싶어 들어갔다. 그 이유는「데라우찌」암살사건 때 선배들도 많이 참가했는데 일본경찰은 덮어놓고 검거 투옥해 흑백을 분별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것이다.>
-3·1운동당시 학생사건을 취급한 사실이 있지.

<아니다. 절대로 없다. 나는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피고는 당시 조선사람을 체포하지 않았나.

<그때 그놈들이 잡으라고 하는 통에 할 수없이 했다. 사실 조선사람 마음이야 다 같지 않은가.>
-피고는 고등계경찰을 할 때 일심사건을 모르는가.

<모른다.>
-하여간 사상범 취급을 했잖았나.

<조선의 사상범을 조선 놈이 취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태석에게 고문당한 사람이 많은 데.

<헌병이었다면 모르지만 경찰은 그런 일을 했을 리 만무하다.>
-증인이 있는데…김태경이 고문당한 사실을 얘기하고「김태석이라면 3척 동자도 떨 것입니다」라고 했다.

<변호사 법정 구속>

<당시 김태경이 같은 불량배를 한 달이나 유치장에 넣어 놓고 밥을 먹였을 리 만무하다. 그 자가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런 말 할 리가 없다.>
-피고가 고등경찰에 있을 때 중요 사상범 8할을 취급했다는데.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는가.>
-서울역 폭탄사건을 봤었다지.

<그 때 신문기자「사이또」의 사진을 찍을 폭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강우규 선생도 피고가 체포했다지.

<천만에…강 선생은 9월12일 종로 서에 자수해 왔다.>
-그때 피고는 강 선생을 수색했다던데….

<나는 관계치 않았다>
-강 선생 취조까지 맡아 놓고….

<아니다. 내가 강우규를 취조했다면 제법 값이 나갔을 것 아닌가.>
그는 시키는 일은 어쩔 수 없이 했을 뿐 조선인으로서 조선인을 위해 일했다고 우겼다.
이 때문에 심리 중 참다 못한 담당검찰관 곽상훈 의원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연필을 내던졌다.
『그 당시 피고가 혀를 빼서 죽인 고문을 본 사람이 있다는데 피고는 여전히 부인하겠는가.』이 호통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역시 부인했다. 곽 검찰관은 다시『나와 함께 일제 때 옥살이하다 숨져 간 황성유가 내게 한 유언이 있다. 「나의 죽음은 결국 김태석의 고문 때문이다」라고. 이래도 피고는 부인할 셈인가』고 했지만 태연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그의 담당 변호사였던 오숭은씨도<피고가 경찰 직에 있을 때는 독립운동가 사태가 나다시피 했고 20년 7월의 밀양의 독립투사 폭탄적발 때 최자남·황삼규를 체포했는데 이들은 폭탄을 일시 맡아 있었던 사람들로 애국지사라 할 수 없고 피고는 이런 가짜 혁명투사를 잡았던 것>이라는 변호를 해 검찰관 곽 의원에 의해 변호사마저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결국 곽 검찰관은 김태석 피고를 향해 <네가 죄를 부인하는 것 역시 네 자유다. 그러나 그대에게 고문을 당해 죽어 간 황성유의 동지로서 내가 검찰관이 되어 그대를 심문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로 심문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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