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깊이보기 : 중·러 신 밀월시대

두 정상 잦은 회동…'미 독주체제'에 도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유라시아의 전략지도가 급변하고 있다. 유라시아의 두 거인인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들어 전략적 연대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면서, 일각에서는 냉전 종식 후 관철돼 왔던 미국의 일극주의 체제가 서서히 종언을 고하는 게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과연 중.러 간 전략적 연대는 1950년대 중.러 동맹의 수준까지 확대.심화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파장은 한국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21세기 동북아 전략지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한국이 직면한 도전과 응전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알아본다.

5월 8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모스크바를 방문,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한 달여가 지난 6월 30일 그는 다시 모스크바에 나타나 푸틴과 "중.러 양국이 다극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함께 노력할 것과 국제사회에서의 주권 존중, 인권의 지역적.국가적 특성을 인정할 것"등을 담은 '21세기 국제질서에 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북한에) 압력을 가하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해결 방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북핵 사태와 관련한 공동의 입장을 밝혔다.

푸틴과 후진타오는 다시 7월 5일부터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에서 미국의 중앙아시아 지역 주둔군 철군 일정을 요구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을 주도했다. 그러곤 영국으로 무대를 옮겨 G8 정상회담에 나란히 참석했다. 양국 정상의 이러한 이례적인 공동행보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양국이 상호 연대해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에 반대하며 다극주의 체제 형성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 중국이 공식적으로 양국 공동의 반미전선을 구축하고 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국은 일관되게 반테러 전선에서 미국과의 공조를 다짐하고 있다. 더군다나 푸틴은 5월 미국에 안정적인 석유의 추가 공급을 약속, 미국과 전략적 협력을 확대하고 계속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중.러 양국은 세계전략과 동북아 전략에 있어 일관되면서도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전방위적인 협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고 이러한 노선은 세계전략적 차원에서는 미국에, 동북아 전략적 차원에서는 일본에 도전과 견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양국 공조의 하이라이트는 G8 정상회담 폐막일인 8일 나왔다. 이날 푸틴은 향후 동북아의 에너지 안보 및 지역전략과 관련해 결정적 의미를 갖는 러시아 극동 송유관 노선을 중국을 우선적으로 배려한 형태로 마무리지었음을 공식 선언했다.

이날 푸틴은 극동 송유관 라인 중 1단계로 연 공급량 3000만t 규모의 노선(시베리아의 타이셰트~극동 스코보로디노)을 우선 건설해 2008년부터 매년 2000만t의 석유를 중국의 다칭으로 수송하고, 나머지 1000만t은 철로를 이용해 극동의 태평양지역으로 실어 날라 여기서 일본 등지로 수출하겠다고 밝혔다.

송유관 노선은 단순한 에너지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유라시아 지역에서 러시아가 중국 및 중앙아시아 그리고 남북한으로 이어지는 장기 국가전략 구상과 분명한 연계를 갖고 추진하는 것이어서 이날 푸틴의 발언은 일본에는 분명 큰 충격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 개혁에서도 행보를 같이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에 반대하며 이의 저지를 위한 군사.기술적 협력을 확대할 것임을 천명했다.

러.중 양국의 이와 같은 전략적 연대는 동북아와 세계에서 양국이 서로를 주요한 파트너로 삼고 주요 이슈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양국의 이러한 전략이 한국 등 주변국 정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함을 예고한다.

현재 양국의 협력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과거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만들었다가 60년대 국경분쟁으로 사문화됐던 중.러 동맹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양국의 접근이 포괄적인 반미동맹으로 진전될 조짐은 없다. 하지만 50여년을 끌어온 동쪽 국경선 문제가 지난 6월 블라디보스토크 러.중.인도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타결을 본 것처럼, 전략적 연대에 관한 양국 최고지도부의 의지가 워낙 강해 러.중 관계 발전의 한계가 어디까지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중국은 러시아제 수출무기의 45~47%를 구매하는 최대 무기 구매국이자 러시아의 동북아 지역 최대 교역국이다. 또한 내년 정도면 명실상부한 1위 투자국이 될 전망이다. 여기다 올해 1월부터는 국경무역에서 루블-위안 간 직접 결제도 가능해져 현재 200억 달러 규모인 양국 간 교역량이 2020년엔 12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양국은 올 8월엔 육.해.공.해병대까지 참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합동 군사훈련을 황해와 발해만 지역에서 실시한다. 이번 군사훈련은 99년 옐친과 장쩌민이 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 폐기와 미국의 MD 구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주로 기술.무기 분야에서 이뤄지던 협력이 실질 군사전략적 분야로 이어져 시행되는 50년 만의 최대 규모 합동훈련이다. 이 때문에 포괄적 반미동맹으로의 발전은 멀었다 하더라도 중.러 양국의 접근과 연대가 동북아에서 그리고 있는 그림은 분명 한국의 전략지도에 상당한 수정과 변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중.러의 전략적 연대는 이미 90년대 말부터 큰 틀의 원칙에 따라 꾸준히, 그리고 일관성을 가지고 이뤄져 왔다. 96년 옐친의 심장수술 후 모스크바를 가장 먼저 찾은 외국 정상은 중국의 리펑 총리였다. 2003년엔 후진타오가 주석 취임 후 첫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주석 데뷔 후 첫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옐친과 리펑, 후진타오와 푸틴은 양국 간 전략적 연대를 천명했다. 특히 2003년의 양국우호협력 선언은 50년대 동맹조약을 상기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대중 포위망을 풀고 안정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할 중국의 외교노선과 소련 해체 후 위상 하락을 방지하고 새로운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지정학적 연대와 신동방정책이 필요하다는 러시아의 전략이 양국의 이러한 접근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러 간 전략적 연대에 관한 정책은 러시아에서는 97년 이후 명확해졌다. 당시 외무장관을 거쳐 총리에 오른 프리마코프는 러시아 외교전략을 지정학 전략을 바탕으로 새롭게 입안했다. 알렉산드르 듀긴과 같은 유라시아론자들, 미트로파노프 하원 지경학위원장 같은 민족주의적 우파들이 그를 지지했다.

이후 프리마코프는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단극적 지배구조를 해소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인도.브라질 등을 순방했으며 98년 이후 3국 간 고위협상을 정례화했다.

이처럼 중.러 양국의 긴밀도는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간다. 그리고 명확한 철학적 비전과 전략에 입각해 추진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 체제가 생각보다 빨리 다극화의 과정을 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마저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중.러의 전략적 연대가 한국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이며 한국은 과연 이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이냐다. 한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과 방향, 그리고 한국의 선택과 비전에 미국 등 국제사회가 유난히 관심이 쏟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