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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문지·이프·뿌리깊은 나무 … 잡지 창간사로 본 지성의 외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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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천정환 지음
마음산책, 824쪽
3만5000원

‘123편 잡지의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요약한다.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한국 잡지의 창간사 중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모으고 시대별로 해설을 붙였다. 해방부터 2000년대까지 나온 게 대상이다.

 창간사의 문구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한걸음 더 나아갔다. 잡지가 나온 당대의 현실과 지식인·출판인·문화인의 정신과 말 속의 외침까지 집어냈다.

 지은이는 창간사를 꼼꼼히 따져본 뒤 잡지 창간은 세상을 바꾸고 싶거나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 싶은 욕망이 동기라는 결론을 내린다. 잡지를 매개로 앎과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는 ‘먹물’의 욕망에서 비롯한 측면도 있다. 이에 따라 잡지 창간사들은 “한국 지성, 특히 참여적인 지성의 전통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재미난 사실은 창간사의 성격이 강할수록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 더욱 간절하다는 점이다. 세상과 투쟁하고픈 욕망,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계몽성이다. 1997년 나온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의 창간사 제목이 ‘출사표’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 잡지의 역사에서 70년대는 각별하다. 굵직한 잡지가 창간돼 한국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해서다. 계간 ‘문학과지성’은 70년 창간호에서 “이 시대의 병폐는 무엇인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한국문학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온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의 지양이라는 과제”가 창간 목적임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창간사가 문화 테제가 된 경우다.

 ‘한국 잡지의 전설’이라는 한창기씨가 발행·편집인을 맡아 76년 창간한 ‘뿌리깊은 나무’는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라는 제목의 창간사를 실었다. “좀 엉뚱해 보이는 이름을 지었습니다”로 시작해 잡지 이름이 ‘용비어천가’에서 비롯했음을 밝힌다. 엉뚱한 이름으로 상징되는 이 잡지의 한글중심주의·민중주의·생태주의 편집이 80년대 이후 한국문화 전반에 스몄다는 건 비단 지은이의 평가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한씨가 84년 창간한 ‘샘이 깊은 물’은 ‘사람의 잡지’라는 가슴 설레는 제목의 창간사를 실었다. 잡지가 시대를 개척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서슬 퍼렇던 80년 창간된 ‘실천문학’은 ‘보천보 뗏목군들의 살림’이라는, 당시로선 생소한 제목의 창간사를 실었다. 창간사는 “보천보라면…(중략)…보천보 전투에서 다시 조선 독립군의 면모를 되살려낸 그런 고장이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사실 보천보는 1937년 6월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 김일성·최현(지난달 아시안게임 폐막일에 인천을 찾았던 북한 노동당 비서 최용해의 아버지)과 조선광복회 소속의 박달·박금철 등이 습격해 일본 순사의 딸인 2세 여아와 요릿집 주인을 사살한 함경남도 갑산군의 지명이다.

 잡지 창간사 작성자는 출판문화계의 거성,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과 문필가를 망라한다. 그런 사람들이 남긴 글을 읽다 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영혼과의 만남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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