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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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7백년 역사의 시조가 본류이고 70년 역사의 시가 지류인데도 오늘에 와서는 역조 현상을 빚어 시조가 뒤로 밀려난 느낌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조를 쓰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시조인구가 확대될 전망이므로 이런 역조가 바로잡힐 날은 올 것이다.
『백련연적』은 생활의 체취도 짙게 깔리고 서정을 버무리는 힘도 좋아 가슴에 닿아오는 것이 있는 작품이다.『늪』은 언어를 좀 무리하게 다룬 느낌이다. 시상이란 어떤 관념의 생경한 드러남이 아니다. 내심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삭여진 다음, 잘 익은 술이 발효되어 넘치듯 자연스럽게 유로되는 상이야말로 시 또는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2』또한 앞의 작품에서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겠다. 굴절을 거치지 않은, 다만<느낌>만으로는 남을 감동시킬 수가 없다.<∼어요><∼줘요>의 경어투가 마지막에 가서는<∼있다>의 반어체로 바뀐 점도 문제다.
『별』의 작가는 시조의 비밀을 엿 본 작가가 분명하다. 우선 전혀 시조의 리듬울 상하지 않고 있다.<아득히 먼 나라 말로 다가앉는 목소리>는 가구다. 소녀적 감상성을 지워나가면 길이 보일 것 같다.
『그네』의 작가는 우선 좋은 소재를 잡았다(꼭<우리 적>인 것만이 좋은 소재라는 뜻은 아니지만).그러나 첫 수 중장의<아카샤 잎>이라든지 두 번째 수 종장의 <머리칼 헝클은 새로>는 자수에 얽매여 언어를 구겨 넣은 듯해서 마음에 걸린다.
『5월』은 쉽게 쓴 감을 주는데 그 점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여 호감이 가는 작품이다. <한나절 뻐꾸기는 제 홀로 심심해서 그림자나 쪼아대며 메아리를 불러내고>는 탁월한 귀절이다.
『비오는 밤에』에서 한수 안에 같은 어휘가 두번 쓰이는 것을 본다. 첫 수의<내>가 그것인데 의도적으로 잘 살리는 경우가 아니면 덧나기 쉽다. 언어를 아껴야하는 시나 시조에 있어서야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절도하는 서까래>라든지, <불혹의 빈 놋대야>도 어색한 표현이다.
이밖에『할미꽃』은 할미꽃을 노래했다기보다는 산곡의 한나절을 읊은 것. 앞으로 더욱 분발을 바란다.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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