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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8)<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36)「미깡 정」의 인기 폭발|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정복수의 프로데뷔전은 일본인강자 「도꾸나가」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도꾸나가」는 풍부한 아마추어 경력에다 프로전향 2년째로 필리핀원정에서 갓 돌아온 상승주였다.
이 대회는 하와이와 필리핀을 원정한 심상욱의 귀국환영 경기였으며 심상욱-박용진의 메인이벤트에 앞서 벌어졌다.
프로복싱의 프러모션을 시작한 황을수는 첫 작퓸을 의욕적으로 꾸며 정복수에게 일본인 강호를 대전시키는 모험을 했다.
일부에선 「도꾸나가」가 너무 세므로 정복수의 새 출발에 실망을 안겨줄 것이라고 우려했고 황을수도 몹시 불안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정복수는 1라운드부터 특유의 저돌적 대시로 아웃복싱을 하는 「도꾸나가」를 시종코너에 몰아넣고 샌드백 치듯 일방적으로 난타했다.
「도꾸나가」가 KO당하지 않고 6회를 버틴 것이 장했다.
장안의 팬들은 후련한 즐거움, 일본인을 개 패듯 두들기는 통쾌감을 만끽했다.
한여름인 8월 정복수는 역시 일본인선수「다나까」를 물리쳤고 9월엔 극동을 순회 중이던 독일선수「인하베트」를 3회1분57초만에 TKO로 일축, 2개월 동안 3전 전승의 기염을 토했다.
이젠 큰 무대를 찾을 때가 되었다.
40년10월 정복수는 스승 황을수와 함께 현해탄을 건넜다.
이에 앞서 황을수는 일본 권투구락부의 도변용차랑에게 편지를 띄워 정복수의 후견을 부탁했고 도변의 쾌락을 받았다.
일구에 입문, 3개월간의 수련을 마친 정복수는 마침내 41년1월말 동경의 링에 올라섰다. 링네임이 복전수랑이었다.
상대는 한국인 2세인「야마다」.
「야마다」는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하는 선수였는데 정복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2라운드에서 이미 코피를 흘리고 3라운드에선 그로기, 결국 5라운드 도중 피투성이가 된채 기권하고 말았다.
일본 복싱흥행사들은 정복수의 데뷔전에 앞서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전 일본 및 동양의 아마추어 페더급 선수권자로서 프로계 석권도 명명백백한 최대의 유망주』라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이런 예측이 그대로 적중했다. 동경에서 데뷔한 그해(41년)에 중촌정일 강야송웅 상택태낭 광산일낭(김은성)등 강호들을 연파, 13전 전승(8KO)의 무적탱크였다.
정복수는 이로써 페더급에서 사실상의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41년7월 대판신문의 인기투표에서 랭킹1위를 차지. 이때는 공식타이틀전이 중단되어 있었다).
42년에 들어서도 정복수의 쾌속행진을 저지하는 선수가 없었다.
이해에도 11전 전승이었다.
정복수는 원래 페더급이었지만 점차 체중이 늘어 라이트급 혹은 웰터급 선수들과도 경기를 벌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오로지 승리뿐이었다.
일본의 복싱계 주변에는 한국인의 최강 정복수와 일본인의 권웅 굴구항남의 대결로 링의 왕을 결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도 했다.
그러나 굴구는 정복수에게 체중을 밴텀급까지 내리라는 요구를 해 결국 이 세기의 빅 매치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만큼 정복수는 동경등장 1년만에 중량급의 최강자로 군림한 것이다.
정복수는 일본인들마저 전무후무한 파이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경기태도는 상대를 짓이겨 놓을 듯 살기 등등(?), 링을 전율로 휩싸이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정복수의 감정과 제스처만 보고도 흥분에 들뜨고 전신이 땀에 절임을 느끼게 된다.
키가 1백67㎝에 불과하나 다부진 몸매에 얼굴 생김이 전형적 투사형인 정복수는 마우드 피스를 경기중에 질근질근 씹어 다시는 못쓰게 만들기 일쑤였다.
한방에 상대를 때려뉘겠다는 혼신의 정력이 주먹뿐만 아니라 이빨마저 갈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복수는 흔히 마우드피스 대신 귤껍질을 씹으며 경기를 하는 버릇도 있었다. 상대의 웬만한 주먹엔 겁내지 않는다는 자신감에다 마우드피스를 씹어 없애는 버릇, 그리고 귤껍질을 씹는 각성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별난 별명을 붙여줬다. 「미깡 정」이었다.
43년 들어 2차대전이 치열해진 와중에 정복수는 독매신문기 쟁탈전에서 청색기를 획득, 페더급 정상을 확인했다. 정복수로선 프로전향 후 유일한 공식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복싱은 중단되었다.
프로생활 약 2년 반만에 정복수는 28전 전승을 기록하고 귀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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