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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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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업들은 위험도 많고 이자도 높은 사채를 왜 많이 써야 하는가. 우리 나라 기업들의 재무구조를 들여다보면 해답은 자명해진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국내 전체 제조업체의 자기자본 비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자기자본 비율이 78년에 21.4%, 79년에 21%, 80년에 17%로 조사됐다.
기업들이 평균 자기 돈 17%에 남의 돈 83%로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기업·재벌그룹으로 갈수록 빚더미를 안고 있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축적된 자본이 없이 방만한 확대경영을 하다보니 빚을 많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니까 문제다.
겉으로 보면 웅장한 빌딩을 갖고 있는 일부 그룹차원의 재벌기업의 재무구조는 더욱 취약해 자기자본 비율이 평균10% 선으로 전해지고 있다.
60연대 육아기와 초년대의 고도성장기를 통해 백화점 식으로 기업을 확장했지만 속이 알차게 꾸려가고 있는 기업이 몇 개나 될지 의문이다.
기업들이 가뜩이나 빚이 많은데 이자도 싸고 안전한 은행을 찾지 않고 사채에 목줄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은행돈을 쓰는 것이 하나의 특권처럼 돼있기 때문이다.
취약한 재무구조, 실물경제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제도금융, 그리고 자기 돈을 자기기업에 넣기보다는 은행에 넣는 것이 유리한 세제.
이런 것들이 사채시장을 번성하게 하는 이유이며 바로 여기에 기업의 부실, 금융의 부실, 한국경제의 비효율성이 있다.
예금하는 사람보다 돈 빌어쓰겠다는 사람이 훨씬 많아 만성적인 자금수요 초과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인데 은행의 문턱은 그렇게 높을 수가 없다.
은행도 돈 장사인데 일반서민들에게 돈 빌려주는 것은 자비 베풀 듯 하고, 어떤 큰 기업에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꿔주고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율산·대봉·동명산업·신승기업 등이 바로 이 같은 사례이며 정부가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고 손을 들고만 고려원양·대농·삼화 등도 비슷한 경우다.
이름을 대면 누구도 알만한 어느 재벌 급 기업총수의 말은 새삼 부실기업과 은행과의 고질적인 관계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바로 어느 재벌회사의 재무담당중역이 『이제 더 이상 은행돈을 빌면 이자조차 낼 수 없으니 기업규모를 조금 축소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룹회장은 『은행은 부실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 기업은 죽일 수 있지만 거액대출을 해준 기업은 죽일 수 없는 법』이라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가 대출을 받으라』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서민들로서는 높기만 한 은행문턱에서 무안을 당하느니 다소 위험하고 이율은 높지만 손쉬운 사채를 찾게 된다.
또 담보가 부족한 기업도 급할 때는 사채시장의 신세를 진다. 돈은 필요한 시기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채야말로 공 금융보다는 훨씬 능률적인 신용위주의 지하은행이다.
만성적인 자금의 초과수요가 계속 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채는 기업 도산을 막아주기도 하고 일반서민들에게는 급전융통 면에서 구세주의 역할도 한다.
물가가 크게 오르는 상황에서 마땅한 사업을 할 능력이 없는 정년퇴직자가 퇴직금을 굴리고, 남편 잃은 부인이 자식들의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키 위해 작은 돈이나마 믿을만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채가 모두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일반 서민들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거액을 갖고 고리의 돈놀이를 하는 큰손들이 문제가 된다. 이들 큰손들은 탈세를 하고 경제구조를 왜곡시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2천 6백여억원을 주무르던 장영자 여인이 80년도부터 올 4월까지 국세청에 낸 세금은 불과 4백 21만원이며, 이철희씨는 같은 기간 중 4백 93만원으로 나타났다.
사채=탈세의 등식이 성립되는 한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일반서민들과의 위화감은 깊어만 갈 것이다.
또 사채업자들의 돈은 부동자금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갖가지 경제적·사회적인 해악을 준다.
아파트 투기자금으로 쏠려 집 값을 올려놓아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깨뜨리기도 하고 증권시장을 광란으로 몰아넣고 숱한 선의의 투자자를 울리기도 한다.
사체이자는 자산소득 중에서도 가장 악성소득이며 불로소득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불로소득을 불리는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계층간의 대립은 첨예화될 것이다.
사채를 뿌리뽑기 위한 조치가 60년대 이후 두 차례나 있었다.
61년 6월 10일 군사혁명 정부의 농어촌 고리채 정리와 72년 8월 3일의 사채 동결령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는 견해가 높다.
의욕과 충격요법만으로 경제를 이끌 수는 없다.
사채를 규제한다는 것과 사채를 철저히 추적해 세금을 매긴다는 것과는 다르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철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
물가를 잡고 사 금융을 공 금융으로 끌어들이는 방안도 착실히 연구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지 말아야한다.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한 것이다.
경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박병석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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