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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도 몰랐던 "천의 얼굴"이철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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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장씨의 이색 결혼식은 지난2월14일(일요일)낮12시부터 서울 장충동2가208 아시안 사파리 클럽 실버하우스에서 L스님(건 조계종 종정)의 주례로 스님들의 독경과 목탁속에 시종 불교식으로 거행되었다.
이날 결혼식은 대지 2천6백여평, 건평 8백50평의 2층 건물 중 하객모임은 2층 칵테일 바, 예식은 연회실, 피로연은 1층 중국관에서 차례로 진행되었다.
하객은 경계·재계·불교계와 군·기관 출신 인사, 친척 등 모두 2백여명.
참석이 확인된 하객은 국회의원 K씨(국민)·S씨(민정)·L씨(의정 동우회)·C씨(국민)· L씨(민정)·L씨(민정) 등과 M씨·C씨 등 장성 출신 전국 국회의원, 모 관리공단 이사장 Y씨, 전 체신부 장관 S씨, S은행 K햅장·C은행 L행장, L스님과 국제 불교도 협의회 사무총장 L씨, 미 중일보사장 L씨 등이다.
결혼식 축사는 장씨가 후견인으로 있는 국제불교 도 협의회 회장 C씨와 S의원이 했다.
C씨는 당초 축사 부탁에 사양했으나 이철희씨가 간곡히 요청하는 바람에 3분여 동안 축사를 했다.
C씨는 이씨가 군대 후배에다 국회에서 불교회 활동을 같이했고 이씨가 지금까지 정식 결혼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잘 됐다」는 생각으로 축사를 했다고 말했다.
C씨는 축사에서 두 사람의 인연을 강조, 불심을 갖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당부했다.
C씨는 이날 결혼식이 조용히 거행될 줄 알고 나갔으나 의외로 규모나 하객들의 숫자가 엄청나 놀랐다고 말했다.
한 참석자는 신부 장씨의 과거와 나이 등을 볼 때 일반적 호칭인「양」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궁금했는데 신랑에 대해서는「장군」으로 통일됐으나 신부에 대해서는「사회자는 보살」,「C씨는 양」, 「S씨는 여사」로 각각 표현하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전 국회의원 M씨는 이씨가 같은 고향(충북 청원)사람인데다 군데 후배여서 초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사파리 클럽은 80년4월 보광 개발(사장 은희만)에 의해「외국인 전용 관광업소」로 준공되었으나 문을 열지 못하다 사파리 클럽에 5억원에 임대해줬다.
사파리클럽 아시아 본부는 야생 동물보호와 수렵관광을 목적으로 지난해 7월7일 아시아 11개국이 모여 발족한 친목 단체석.
아시아본부 회장은 박종규씨(사격 연맹 회장)가 맡고 있고 현재 정회원은 80여명, 회원가입비는 3백만윈이다. 이철희씨나 장 여인은 이 클럽의 회원이 아니고 단지 장소를 빌어 결혼식을 했을 뿐이라고 클럽 측은 해명했다.
○…「금융지진」의 숨은 불씨. 사채시장의 대부 이철희. 그는 과연 누구인가? 5·16후 제3공화국 20년 동안 한국 정보의 총 본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고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그 화려한 무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철저히 아는 사람이 없다.
군(군)과 모 기관에서 10여년씩이나 함께 근무해 온 동료나 부하들도 그가 어느 국민학교·중학교를 나왔는지조차 모른다. 그는 가까운 친척도 없고 유별나게 친한 친구도 없으며 그의 접을 가본 주변인물도 없다.
그래서 그를「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부른다.
○…이씨의 고향은 충북 청원 스스로 고향을 예기한 적이 없어 정확한 출생지를 아는 사람도 없다.
일제 때 고향에서 중학교를 나왔다는 그는 38년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입대, 서울 태릉에 있었던 일본 육군 제22부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만주에서 일본군 오장(오장)으로 근무했으며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제1의 나까노(중야)정보학교에서 정보 하사관 교육을 받았다.
공직에 있을 때 그는 겉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혀 모르는체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환히 알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자금의 모금·분배 등에 깊이 관여, 역대 기관장들도 그를 쉽게 다룰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형적인 정보인으로「개인보안」에 철저해 주위에는 친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으며 이제까지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는 장교 임관 때 1장과 중석으로 자리를 옮길 때 1장 등 2장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
또 중석차장 때 이씨는 자신의 운전사에게도 집을 가르쳐 주지 않고 퇴근 때는 집 근처 일정한 장소에서 내린 뒤 운전사에게 다음 날 그 곳으로 나오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이씨는 또 철저한 구두쇠로 평생 다른 사람에게 차 한잔을 사준 일도 없었다. 그에게는 또 꼭지라는 변명이 따라다녔는데 꼭지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
유난히 여자를 좋아했던 이씨는 아우 K씨와 헤어진 뒤 일본인 여자와 결혼, 아들 1명을 두었으나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중정 차장 때는 배우·탤런트 등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일요일 오후의 드라이브와 독서. 골프를 친 적이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6개월만에 그만두었으며 골프장에도 새벽에 혼자 나가는 적이 많았다. 또 공식 석상에서 사진을 찍힐 경우 남의 등뒤로 숨을 만큼 개인 안보에 철저했다는 것.
○…장영자씨가 어렸을 때 살았던 옛 집은 목포 유달산 기슭인 목포시 죽교동374의2. 해발 1백여m의 고지에 세워진 일본식 옛집이다.
장씨네는 30여년 전에 김모씨(42·K모 국민학교 교사)에게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장 여인 일가족은 40여년 전 전남 강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어머니가 목포시 무안동5에서「문화」미장원을 경영, 그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왔다.
또 당시 장씨의 오빠 상률씨(52)는 교회일에만 전념, 가정 일을 돌보지 않아 부인이 마을 어린이들을 모아 개인교수 형식으로 생활비를 벌어왔고 여동생은 옛집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등 어려운 살림살이를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장씨의 가족은 모두 교회를 다닌 착실한 기독교신자의 집안이었고 장씨의 어머니는 성격이 호탕해 이웃에서 여걸로 불릴 정도였다는 것.
○…장씨는 79년 11월부터 81년 말까지 2년 동안 한중 일보 이사로 재직했는데 이기간 동안 한달 평균 22만원의 월급을 받아 유일하게 갑근세를 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중 일보 사장 직무대리 이영배씨(65)는 장씨가 용두산 관음보살상 봉안식을 갖기 전 개년 8월쯤 운전사를 보내 『용두관음 보살상이 중국 보살이니 화교신문인 한중일보에서 봉안식을 하는데 도와달라』는 얘기를 해와 처음으로 알게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모 그후 장씨와 계속 유대관계를 지녔는데 80년4월쯤 장씨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해 사장으로 취임할 뜻이 없느냐고 타진했으나 장씨가 한중일보가 붓수 등에 한계가 있는 것은 전혀 무시한 채 8면으로 신문을 증면하겠다는 등 현실에 맞지 않는「야심적」인 얘기만 해 회사가 오히려 문을 담게 될 위험을 느끼고 그후 회사인수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
한중일보는 지난 55년5월 창간된 화교신문으로 붓수는 1만부 정도이며 서울 명동2가91 중국 대사관 옆에 있다. 사원은 20여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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