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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의 '소리 없는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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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0년 전 타임지가 미래 미국인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를 컴퓨터로 가상해 만든 얼굴을 발표한 적이 있다. 백인.흑인.황인종계, 그리고 라틴계까지 모두 혼합해 탄생한 새로운 얼굴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종의 다양성을 흡수한 미국을 잘 드러내 주는 문화적 상징이다. 그 기사는 미국이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없는 사회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사회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씁쓸했다. 맨해튼 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속에 백인과 다른 인종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리벽이 있다. 미국 사회는 표면상 평등을 표방하지만, 백인이 끝내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인종차별인 듯 보였다.

백인의 인종차별은 백인 우월주의에서 비롯된다. 이 우월주의는 단순히 생물학적 구별을 넘어선다.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백인들은 이 구별을 사회적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못나도 백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다른 인종을 배제하여 가장 훌륭한 흑인도 백인만은 못하다는 인종 간의 위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 차별이 백인의 인종 차별만큼 골 깊은 유리벽이다. 오랜 전통과 문화를 자랑하는 국가에서는 남녀를 구별 짓는다. 그래서 이 구별 짓기가 남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백인의 인종차별에서 보듯이 구별은 결국 차별을 포함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구별도 차별도 결국 분별의식이며 이것은 우리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유마경'에 나오는 사리불과 천녀의 대화는 분별의식이 사물의 본성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근원임을 잘 드러내 준다. 사리불이 문수보살과 함께 유마거사에게 병문안을 갔다. 그 방에서 청중들과 함께 천녀가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불이법문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 꽃비를 청중의 머리 위에 뿌렸다. 꽃이 보살들의 몸을 스쳐 떨어질 뿐인데, 사리불의 몸에는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붙은 꽃을 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천녀는 "왜 꽃을 떼려 하십니까"라고 묻자, 사리불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천녀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이 꽃에는 분별의식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분별의식이 있기 때문에 꽃이 당신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보살들은 분별의식이 없기 때문에 꽃도 보살에게는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분별의식에서 생겨난 생각을 모두 버리면 악마도 머물 장소가 없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눈 뒤 사리불은 천녀의 높은 정신세계에 놀라며, 왜 당신은 남성의 몸으로 변신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녀가 바로 대답했다. "나는 이십 년 동안 내 속에 있는 여성을 추구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몸을 변신해야 하는지요."

사리불의 질문은 높은 정신세계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사고에 의한 것인데 반해 천녀에게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답하고 있다. 이렇듯이 생명의 본성에는 인종 차별도, 남녀 차별도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만든 분별심이 차별을 만들 뿐이다. 본성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천녀에게는 여성도 남성도 존재하지 않고, 외형적인 형상은 진리로부터 화현(化現)된 한 모습일 뿐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 동물, 식물, 심지어 작은 미생물까지도 말이다. 천녀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 우리들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릴 그날을 기대해 본다.

소 운 약사암 스님

◆ 약력=미국 하버드대 철학박사, 저서 '하룻밤에 읽는 불교' '하버드에서 만난 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