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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백년」의 주역들<20>-한인 비행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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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캘리포니아주 월로즈시에서 발행되는 『윌로즈·데일리·저널』은 지금으로부터 꼭62년전인 1920년 2월19일자 신문에서 1면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색적인 기사를 실고 있다.
『한국인들 드디어 비행학교를 연다-장소는 퀀트스쿨 교지 40에이커를 임대. 한인 쌀 부자 김종림이 돈을 대기로-교사와 학생 등 30여명, 훌-스코트사 제작 최신형 복섭기 3대 도입 예정!』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가는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북으로 4시간 가량 달려 인구 5천의 자그마한 전원도시 휠로즈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문 거리, 어쩌다 한 두대씩 지나가는 자동차…어느 모로 봐도 특색이라곤 별로 없는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이곳 휠로즈가 속해있는 글렌카운티(인구 1만5천명)는 유명한 캘리포니아 쌀의 주산지. 로키산맥에서 발원, 장장 6백30km로 흘러내리는 새크라멘토강의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미작이 성해 이웃 콜루사카운티와 함께 가주미의 곡창으로 이름난 곳이다.

<복섭기 3대 구입>
캘리포니아지방에 미작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 당시 국제곡물시장에서 밀의 시세가 계속 하락하자, 이 지방 농민들은 밀 대신 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물은 부근을 흐르는 새크라멘토강에서 거의 무진장으로 eof수 있었고, 주요 쌀 소비지역인 아시아 각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시달리고 있어 판매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쌀 농사가 시작되자 노동력으로 각광을 받은 것이 바로 쌀 재배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던 아시아계 노동이민들. 맨 먼저 중국인이, 그리고 일본인들이 다음을 이었다. 한국인 쌀 부자 김종림의 신화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l903년 하와이에 첫발을 내린 한국인 이민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인간이하의 중노동으로 생활하다가 캘리포니아지방의 쌀 농사 소식을 들었다.
그후 본토로 이주, 또는 탈출하는 한국인들이 늘었고, 기왕에 본토에 있던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쌀 농장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다.
김종림은 그 중에서 가장 성공한 예였다. 1920년 비행학교 설립당시 콜루사카운티에 대규모 쌀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는 3천 에이커의 땅에 연간 15만섬을 거두는 거부. 당시 쌀값은 섬당 8달러. 그러니까 연간1백20만달러를 수확하는 어마어마한 대농이었다.
하지만 쌀 부자 김종림은 단순히 돈만 아는 부자는 아니었다. 일찍부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입단한 그는 대단한 애국심의 소유자로, 기회있을 때마다 재미 한인단체에 많은 애국기부금을 내곤했다.
그가 자신의 재산을 좀더 보람있게 쓰고자 했을 때 한사람의 동지-계원 우백린을 만났다.

<7개월만에 폐교>
한말의 명문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1895년 정부가 선발한 국비유학생으로 도일, 경응의숙을 거쳐 일본육사를 다녔던 그는 귀국 후 구 한국군 정령(대령)까지 진급,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등을 지낸 전형적 무인이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해산된 후 그는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19l4년 미국으로 망명, 박용만의 국민군단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이 보여준 위력을 보고, 일본은 육·해군은 강하나 공군은 거의 전무하므로 『앞으로 한일간 독립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공군으로 일본을 압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섰을 때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우백린은 자신의 평소의 구상을 김종림에게 말하고, 그로부터 재정지원을 약속 받아 윌로즈지방에 한인비행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윌로즈지방에 한인들이 비행학교를 세워 비행사를 훈련시킨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윌로즈주민들 사이에선 캘리포니아의 평화유지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 크게 반대했다.
더구나 당시는 미국인들 사이에 아직도 반동양인적(황화론)감정이 많이 남아 있던 때.
주민들 사이에 이처럼 반대의견이 일자 노백린은 3·1만세운동 1주년기념일인 1920년 3월1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비행사양성은 1년전 3월1일에 시작된 한국인들의 독립투쟁의 계속이며 ▲훈련된 비행사들은 전국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참가, 조국에서 싸우게 될 것이니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며 ▲미국민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국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원해줄 것을 당부했다.
비행학교 설립계획은 그 뒤 큰 문제없이 순탄한 진전을 보였다. 학교부지로 예전 퀸트 스쿨이었던 곳에 40에이커 상당의 토지를 빌어 격납고를 세우고 이어 비행기를 주문했다.
교관으로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이름난 비행사였던 「해피·브라이언트」. 1차대전중 유럽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던 사람으로 전쟁 후에는 곡예비행사로서, 그리고 레드우드시에서 사절비행학교를 운영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던, 당시로서는 최정상급 파일러트였다.
이밖에 그의 보조역으로 레드우드 비행학교출신인 한국인 비행사 이용선·이초·오임하 등이 있었으며, 학생으로 최영길·김태선·박유대·조기호·박대일등 15명의 피끓는 청년들이 모여있었다.
운영재원은 김종림이 매월 희사하는 3천달러의 성금. 이 돈으로 교사의 월급, 학생들의 숙식, 가솔린과 비행기부품 구입에 지출했다.
교사와 학생들은 고된 훈련생활 속에서도 『동경 하늘에 날아가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각오로 맹훈련을 달게 받았다. 한국 최초의 공군부대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교 7개월만인 그해 겨울, 후원자인 김종림이 재정적으로 완전 파산하는 불행을 당했고, 그에 따라 학교운영도 어려워져 끝내 스스로 문을 닫았다. <정우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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