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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잘 친 샷이 물방해물로 갔네” … 평양 골프장 쇠채 든 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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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앗! 미니 골프라, 이거 흥미있겠는데…”

 평양 대동강 능라인민유원지 안내판을 지나던 젊은 남편이 반색을 합니다. 곱등어(돌고래의 북한식 표현) 쇼를 관람하겠다고 나섰던 아내도 다가서며 관심을 보입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여성 아나운서는 “세대주(남편)의 생각이 달라졌고, 미니골프장은 이들 부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전합니다.

 얼마전 북한 조선중앙TV가 ‘즐거운 일요일의 하루’란 제목으로 내보낸 프로그램의 한 장면입니다. 10분간에 걸쳐서 골프의 기원과 경기방법을 설명한뒤 미니골프를 소개하는 코너였죠. 한 레슨 프로가 등장해 “골프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유희종목”이라고 말합니다. 이쯤되면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로 백안시하던 골프에 대한 인식은 이젠 북한에서 낡은 생각이 되버린 듯 합니다.

 이런 변화는 김정은 체제 등장이후 두드러집니다. 스키·승마와 함께 골프가 갑작스레 ‘인민친화형’ 레저로 둔갑한 겁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가장 먼저 선보인 게 주민 위락시설인 능라유원지죠. 집권 반년을 맞던 2012년 7월 개관식에 직접 참석해 미니골프장 퍼팅장면 등을 유심히 지켜봤는데요. 이후 군인 승마장을 미림승마구락부로 바꾸도록하고, 지난해 말에는 강원도에 마식령스키장을 완공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 집권시만해도 골프는 평양 특권층이나 조총련계 재일동포가 즐기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18홀 규모의 정규 골프장이 첫 선을 보인 것도 1980년대 후반 들어서입니다. 평양에서 서해안 남포시 쪽으로 40㎞쯤 달리면 나타나는 평양골프장이 그 곳입니다. 경관좋은 태성호수변 120만㎡(36만평) 부지에 전체 6200m에 이르는 코스를 갖추고 있는데요. 1987년4월 김일성 주석의 75회 생일에 맞춰 조총련 상공인들이 건립·기증했다고 합니다.

 12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데 이 중 30명 정도가 캐디라는군요. 과거엔 김일성대나 평양외국어대 학생들을 캐디로 쓰기도 했지만 이젠 탄탄한 골프실력을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체제선전 영화 ‘민족과 운명’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골프를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곳에서 촬영됐다는 설명입니다.

 평양골프장에서 직접 라운딩을 경험한 남한 인사도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1999년 11월, 동행한 남측 관계자와 함께 골프를 즐긴 정몽준 새누리당 전 의원이 그 중 한사람입니다. 당시 70년대 식 일제 골프채 대여료 등으로 1인당 95달러를 지불했다고 하는데요. 평양골프장 외에도 묘향산(평북 향산) 김일성 별장과 평양 용성구역에 골프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구체적 내용은 베일에 싸여있습니다.

 저는 과거 남북회담 취재차 묵었던 평양 양각도호텔 바로 옆 9홀 골프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투숙객이나 관광객을 위해 100m 안팎의 숏홀 위주로 구성된 코스입니다. 당시 회담(남북경제협력추진위) 수석대표였던 김광림 재정경제부 차관(현 새누리당 의원)등과 구두를 신은 채 페어웨이를 걷다 황급히 달려온 캐디로부터 핀잔을 들어야 했죠. 그녀는 “선생님, 여기 골프신발을 신고 와야지 어떻게 그냥 들어올 수 있습네까”라며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평양 한복판 골프장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입니다. 이젠 양각도 개발사업에 밀려 골프장이 사라진 걸 구글 위성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는 물론 김정은 제1위원장도 골프를 치는 장면이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 김정은의 경우 해외유학 등의 경험으로 볼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을 것이란 관측도 있는데 발목수술까지 받은 상황이라 상당기간 골프를 즐기기 힘들걸로 보입니다.

 우상화와 체제선전에 골프를 이용하다 낭패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박영만이란 북한 프로골퍼는 1994년10월 한 호주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장군님은 한 라운드에서 11번의 홀인원을 기록해 38언더 34타를 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9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61타를 친 김효주 선수가 역대 메이저 남녀통산 최저타 기록을 세웠으니, 34타란 숫자는 터무니 없는건데요. 이 때문에 김 국방위원장 사망 때는 “전 세계 골퍼들의 랭킹이 한단계씩 올라갈 것”이라 말도 나왔죠. 지난해엔 유명한 인터넷 골프사이트에 김정일이 ‘골프 이미지를 나쁘게 한 10명’ 중 하나로 꼽히는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북한 골프얘기가 나올때마다 마음에 걸리는게 하나 있습니다. 금강산에 있는 에머슨퍼시픽사가 만든 아난티골프장입니다. 정식 개장을 앞두고 2008년 5월부터 7월 초까지 시범라운딩이 진행됐는데요. 저도 그린에 올리기만하면 홀인원을 할 수 있는 깔때기 모양의 14번홀(파3)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7월11일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이 생기면서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폐쇄 초기엔 관리가 이뤄졌지만 이젠 황무지가 돼버렸다고하는군요.

 가을 단풍이 절경인 금강산 만물상을 향해 멋진 샷을 날리며 “잘 친 샷!(굿 샷)”이란 북한 캐디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게될 날을 고대해봅니다.

이영종 외교보안팀장

사진 설명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부인 이설주와 함께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미니골프장을 들러보고 있다.

평양골프장의 캐디가 티샷 순서를 정하려 나무막대기 모양의 순번표를 들어보이고 있다.

에머슨퍼시픽이 금강산에 만들었지만 2008년7월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으로 문을 닫은 아난티골프장의 14번홀(파 3). 깔때기 모양이라 티샷을 그린에 올리기만하면 홀컵에 흘러들어가 홀인원을 할 수 있다. [조선중앙TV,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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