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베트남의 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번 이라크 전쟁을 지켜본 전세계 시민들은 다시 한번 미국의 힘을 실감했다. 각종 첨단무기도 그렇지만 수십만명의 군대를 그 멀리까지 보내 단숨에 한 나라를 무너뜨린 괴력은 한마디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미국이지만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과거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베트남 전쟁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한 미국은 연인원 2백60여만명의 병력과 가공할 화력을 동원했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였던 이 패배의 후유증은 10년 이상 계속됐다. '디어 헌터'나 '플래툰'같은 영화는 당시 미국인들의 패배의식을 잘 그리고 있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서방의 승리로 끝나고서야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쇼크, 좀 유식한 말로 트라우마(Trauma)를 안긴 베트남인들은 역사상 수많은 외침을 잘 이겨냈다.

미국에 앞서 프랑스가 54년 베트남에 항복했고, 미국 다음으로는 중국이 79년 혼쭐났다. 당시 중국은 "한 수 가르치겠다"며 20만명의 병력으로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한달 뒤 '한 수 배우고' 퇴각했다.

이에 앞서 13세기 베트남은 세계를 휩쓸던 몽고의 침략을 세번이나 격퇴했다. 더 올라가 제갈량이 남만(南蠻)의 맹획(孟獲)을 일곱번 잡았다가 일곱번 풀어줬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에서도 베트남의 저력이 읽힌다.

제갈량, 나아가 한족(漢族)의 우수성과 덕을 강조한 이 말은 거꾸로 읽으면 남만인들이 그만큼 집요하고 강했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당시 남만 여러 민족의 하나였다.

이 찬란한 베트남의 대외(?) 항쟁 승리사에 자랑스러운 기록이 하나 더 보태졌다. 세계 최초로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을 퇴치했다고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식 승인을 받은 것이다.

기민한 초동조치에다 언론에 모든 것을 공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숨기려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중국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나라도 사스 추정환자가 발생하는 등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베트남의 성공사례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 사스뿐만이 아니다. 매사 초기에 공개적으로 대처하면 더 큰 불행을 막는 법이다.

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를 막아 정부에 유리한 기사만 알리겠다는 이 정부는 베트남과 중국의 사례에서 뭐 좀 느끼는 게 없을까.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