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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정 없인 마음의 안정 없다|김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긴 어둠을 헤치고 하루가 열리는 새벽, 날이 샌 무렵이면 내 가슴은 항상 무지개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가슴처럼 뛰놀곤 했다. 이렇다 할 뾰족한 즐거움이 소나기처럼 찾아오지 않아도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 하나만으로도 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연일 충격을 받다보니 새 날에 대한 계획이나 기대, 의지는 커녕 눈을 뜨자마자 닥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각종 무서운 위기로 인해 피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을까 하는 긴장과 초조와 불신으로 피곤이 엄습할 뿐이다.
교사가 어린 학생을 매질하여 전신마비의 불구가 된 아픔, 교실 한복판에서 수업중인 여교사를 구타해 정신을 잃게 한 학부모의 무절제한 행동,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하영웅 형사의 수치스러운 배반감, 대낮 아파트 옥상에서 벌어진 10대 청소년들의 분별없는 성유희, 생활능력 없는 노부모를 방치해둔 채 자기들의 삶만 구가하는 젊은 층의 이기 등 끊임없이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 드러나고 우리를 질식시키는 오염된 분위기가 날로 팽창해 가는 우울하고 답답한 이때, 의령군 궁류면지서 우범곤 순경의 무차별 총격사건 보도는 전국민을 또 한번 경악에 떨게 했다.
일개 성격파탄자가 술에 취해 저지른 만행이라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살육행위이기에 다만 꿈이기만을 바라던 것은 일순간, 국민의 안전한 삶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보관된 카빈과 수류탄이 간첩도 아닌 그 무기고를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지켜야 할 경찰의 손에 의해 수십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으니 지금 이 사회는 확실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우리가 탄 이 배는 어디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일까.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난 병든 사회의 일각이 이렇게 노출될 때마다 거론되는 가치관의 상실이라든지, 교육부재, 극도의 물질향락주의, 인명경시사상으로 흘러가는 현대사회를 새삼 진단하고 개탄해보지만 그 치유의 중요한 열쇠는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각 가정이 갖고있는 것이다.
우 순경의 경우는 따뜻한 가정의 울타리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면 파괴적인 광기 대신 존경받는 민중의 지팡이로서 자기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해도 인간성의 요람으로서의 가정이 버티고있는 한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찾지 못해 길을 잃고 범죄의 그늘 밑에서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휴식이 있는 가정, 안정이 있는 가정, 미래가 있고 정신의 건강이 넘치는 가정실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서울 동대문구 태양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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