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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메마른 세상을 순화시키는 참생명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 전 해외소식란을 보니까 미국에 어린이금지 아파트가 등장했다고 한다.
「꼬마들의 번잡함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 드립니다.」
이것이 임대광고 문구란다.
세상이 정말! 삭막해 간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조차도 공해로 취급되니 말이다.
하긴 아이들의 소란 소음만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공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은 가정은 세를 얻기도 힘들다.
세를 들 때 아이들 수를 줄여 말하는 촌극도 벌어진다.
나 같은 경우는 세를 드는 주제(?)에 주인집 아이들이 많은가를 잊지 않고 물어본다.
세상이 온통 소리 일색이니까 내 공간에서만큼은 소리의 선택권을 누리고 싶은 거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까지 인정 없이 잡음리스트에 올리고 말았다.
소리에 대한 내 괴벽은 심한 편이어서 남의 집에 가서도 발동하곤 한다.
아파트에 사는 한 친구의 집에 가서다.
친구가 사는 곳은 복도가 있는 서민아파트로 문만 열면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아래층이었다.
그래서 항상 조용하지 않은 편인데 일요일 같은 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늦잠을 잘 수도 없을 정도였다.
모처럼 찾아간 날이 그런 일요일이었다.
밀린 얘기를 하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로 얘기가 헛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렇게 시끄러우면 어떻게 견디겠느냐고 걱정했다.
번잡한 직장생활 때문에 항상 정적을 찾는 친구였다. 『이사 또 해야겠네.』내가 부추기는데 친구는 담담히 말했다.
『처음엔 괴롭더니 이젠 괜찮아요. 내가 불편한 대신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다, 생각하면 돼요.』
친구 앞에서 나는 그날 내 선병질을 부끄러워했다.
신자인 친구의 말속엔 종교성이 배어있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도 누가 아이들의 즐거움을 막으랴.
물오른 나무같이 순수한 생명의 놀이가 어찌 공해가 되랴.
문득 내 귀여운 이종아이들이 생각난다. 몇 년 전 부산 이모 집에 갔을 때 나는 이모집 남매를 데리고 송정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다.
내 손을 잡고 물 속으로 폴랑 걸어오던 아홉살짜리 계집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야, 니는 바다에서 소원이 없나? 나는 있다.』
소원이라니. 아이의 입에서 나온「소원」이 신기해서 나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눈을 들여다봤다.
『그래, 바다에서 니 소원이 뭔데.』
『바다 우에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기 내 소원이다.』
나는 계집아이의 뺨이 닳도록 마구 입을 맞추었다.
네 소원이라면 나는 너를 무등 태울 바다가 되겠다.
나는 그날 두 아이를 파도 태우며 생의 아름다움에 콧날이 시큰했다.
어느 봄날엔가는 함께 산에 갔다가 제 친구들과 어울려 내려오려 하지 않던 건태 녀석.
그 꼬마는 내가 먼저 내려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문 밑으로 노란 장다리꽃을 밀어 넣었다.
어린이 금지 아파트가 생겼다지만 이런 아이들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보라.
육식만 차려진 식탁처럼 느끼하고 질린다. 메마른 물질사회를 순화시키는 자연이며 공간인 아이들.
빚쟁이의 추적이 무서워 한 아이가 투신자살한 것도 어른들의 무지스러움이 빚은 사건이요, 돈 봉투 사건 등으로 사도헌장을 만든 것도 어른이다.
요즘 의식개혁이란 말이 나왔지만 우리들의 의식개혁을 요구할 이는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아, 마음껏 소리치려무나.
욕망으로 병든 시대에서 너희들만이 참 생명이니.
곧 5월이 온다.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그날은 어린이를 포식시키자는 날이 아니라 어린이의 마음을 되돌아보자는 날이 아닌지. 우리 어른들은 이 하루만이라도 아이들과 어울릴 일이다.
아이와 어울린다는 것은 함께 아이가 된다는 말이다.
아이의 순수로 돌아가 우리가 거듭 짓고있는 업의 끈을 늦출 일이다. <강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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