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민주주의의 딜레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경이로운 것이다. 역대 군사독재의 반민주적 탄압과 횡포는 빠르게 과거의 추억이 되고 있다. 국민이 스스로 뽑은 대통령이나 정부를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보다 더 실감나는 민주주의의 징표는 없다. 60년 남짓한 기간 우리가 이룬 정치적 성취는 대단한 것이다. 이런 성취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명암에 대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인류가 발명한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가 가장 낫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맨 처음 만개한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그것은 최악의 정치형태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아테네 시민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형에 처하는 등, 참주의 선동에 놀아난 군중이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정치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좋은 나라를 설계하는 데 고심한 플라톤은 특히 정치 지도자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후기의 역작 '국가'에서 그는 자질 있는 어린이들을 뽑아 10년 이상 철저한 종합 교육 훈련과정을 엄수시켜 국가 지도자로 길러내는 청사진을 선보였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단체 합숙을 하는 이 예비 지도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이나 사유재산 소유가 금지되고 공동체에 대한 엄격한 헌신만이 요구되었다.

그의 명성과는 달리 플라톤의 발상에는 비민주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존재한다. 중우정치로 타락해 가던 아테네 대신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의 엄격한 기율을 대안으로 삼은 측면에 대해서는 칼 포퍼처럼 플라톤을 '열린 사회의 적'으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딜레마들을 반면교사격으로 날카롭게 고발한다.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경우 화려한 웅변술과 수사학으로 무장한 선동정치가와 그를 맹종하는 군중이 합작해 민주정의 이름으로 아테네를 붕괴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여의 동역학에 의해 민주주의가 활짝 꽃 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은 민주정 자체에 내재한 역동적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현대 대중 민주주의에서도 변용된 형태로 재생된다.

매스컴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이미지 정치의 범람은 내실과 비전을 갖춘 정치 지도자 대신 천박한 책략가나 외화내빈의 탤런트형 정치인을 정치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기 십상이다. 영웅시된 선동가와 대중은 정치를 감성적 유희와 배설의 장으로 타락시켜 국가 백년대계를 그르칠 수도 있다. 민주정치의 중핵인 참여의 미명 속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토대가 무너지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정치 공동체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고민은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다. 돈 문제나 친인척 문제로 실족하는 정치인들을 많이 보아 온 우리로서는 더욱 그렇다. 지혜와 능력과 비전을 겸비한 철인왕의 기획은 몽상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꿈일 것이다. 그러나 포장만 화려한 용렬한 정치인들을 가려내는 것은 민주시민의 필수적 덕목이다. 유능한 정치 지도자를 육성하고 제대로 선출하는 일은 현대 민주정치의 지평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뽑힌 이들이 보장된 임기를 빌미로 국정을 농단하거나 파탄시키는 난제도 있다. 국가 운영의 지속성과 대의제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선출직 임기제가 오히려 민주정의 핵심인 여론정치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역설도 발견된다. 이런 문제점들을 풀기 위해 국민소환제나 국민파면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외를 불문하고 이런 민주적 검증 제도가 작동한 적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물다.

민주정에 내재한 이런 딜레마들로부터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한국사회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시대로 진입시킨 것은 시민의 힘이다. 그러나 민주적 정권의 거듭된 실정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민생고가 가중될 때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눈부신 성취를 계승하면서 출범했지만 무능과 독선으로 점철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행로는 민주주의의 이런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윤평중 한신대.사회철학

◆약력=고려대 졸, 남일리노이 주립대 박사, 버클리대 미시간주립대 럿거스대 방문교수, 저서:'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담론이론의 사회 철학' '논쟁과 담론' '이성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