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편과 월남인 아내|서울 마포구 상수동 김홍열·「윙티·능」씨 가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남 1녀 국민학교에>
『한국의 시부모님 앞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을 때 웬일인지 하루종일 울고 말았어요.』
「윙티·능」씨(30·서울 마포구 상수동101)는 남편 김홍렬씨(40·성인문화제관부징)와 사이공에서 한번, 서울에서 한번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 두 번의 결혼식은 너무나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김씨와 웡티·능씨는 당시 사이공에 나가 있던 인쇄회사에서 같은 동료로 만났다.
여고졸업 후 한국인 회사에 입사한 윙티·능씨는 같은 재판부에서 근무한 김씨와 사랑이 싹텄다.
첫번째 결혼식은 70년3월13일 사이공에서 올렸다.
『이곳에서 미국사람과 결혼한 여성은 「양색시」라 부르는 것처럼 월남에서도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을 좋게 봐주지 않아요.』
이 때문에 윙티·능씨의 부모는 김씨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한국의 김씨 집에서도 마찬가지. 하는 수없이 두 사람은 친구와 회사의 동료들만 모인 자리에서 약식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들의 반대 속에서 결혼한 것이지만 그때는 철없이 행복하기만 했었다고.
김씨 부부는 사이공에서 아들 명모군(10·국교3년)과 딸 영애양(8·국교2년)을 낳았다. 75년4월에 접어들자 사이공은 더욱 어수선해졌고 월남패망(4월30일)을 눈앞에 둔 4월26일, 부부는 자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나왔다.
귀국한 김씨는 서울 행당동에 전세집을 얻고 포천에 살고 있던 부모님을 모셔왔다. 김씨가 5남1녀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윙티·능씨는 사이공이 적에 떨어지고 월남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또 모든 것이 낯설어서 무척이나 울었다고 했다.

<월남난민회 일 돌보며>
귀국한지 5년만인 80년, 김씨는 한국의 부모님과 친지들 앞에서 정식으로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어딘가 미진하고 허전했던 점을 정식 결혼식으로 메워 보자는 뜻에서 윙티·능씨는 이에 동의했다. 결혼식은 80년5월17일 월남 난민들을 돌보아주고 있는 기독교사회봉사회의 주선으로 기독교회관에서 올렸다. 그동안 윙티·능씨의 양부모역할을 해주었던 봉사회의 김대식씨가 신부입장을 도와주었다. 76년3월부터 편지왕래가 되고 있던 월남의 친정부모에게서 축하편지도 받았다.
약식결혼, 꼭 10년만에 드디어 양쪽부모의 허락을 받아낸 셈이지만 이날의 감회는 10년 전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윙티·능씨의 이야기. 그동안 고국이 망하고 친정부모와는 살아서 만나게 될지 어쩔지 모르는 사이가 되고 말았으며 주변에는 자신과 같은 입장으로 한국에 왔으나 불행하게 되고 만 여성이 많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월남인 친구들이 말하는 「드문 행복한 사람」이지만 그날만은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이젠 한국사람 다 되었어요. 김치는 월남에서부터 배운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신있어요.』
지난해 월남 난민회 사무실을 운영하기 위해 시집에서 분가해 나온 김씨 집안에 된장·고추장·김장은 아직 시어머니가 해주고 있다.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맏며느리 역할을 단단히 해낸다는 김씨의 칭찬. 경조사때면 꼭 한복을 입는데 아직도 버선 신는 것은 질색이라고 했다.
『시동생 결혼식때 처음으로 버선을 신었죠. 버선 신은 발이 무감각해진 바람에 막상 식장에 도착하고 보니 한쪽발의 고무신이 없어지고 말았어요.』
윙티·능씨는 한국의 풍속이 처음 이 버선처럼 딱딱하게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살다보니 한국사람만큼 인정미 넘치는 국민이 없는 것 같다고.

<난민회원 5백명 가량>
지금도 한복은 곧잘 입지만 버선과 고무신은 신지 않는다. 음식 역시 양념을 만이 쓰는 월남식과 재료의 맛을 잘 살리는 한국식을 적당히 섞어서 요리하고 있다.
요즘 회사에 일이 많아 야근이 잦은 김씨지만 아내의 생일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1년 동안 쓸 화장품을 생일선물로 정해놓고 주고 있다. 역시 회사 사람들과 함께이긴 하나 한달에 한번씩 가족이 모여 야유회를 간다.
김씨는 가능하면 아내에게 한국의 명승지 구경을 시켜주려고 노력하지만 워낙 일이 바빠 서울 근교가 고작. 그러나 80년 결혼식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한국의 절경을 보여주었다고. 김씨의 이같은 마음씀 때문에 윙티·능씨는 한국의 행복한 며느리가 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 사이공에는 윙티·능씨의 여동생 5명과 오빠 1명이 살고 있다.
한달에 한번정도 편지교환을 하는 동생들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둘려주고 월남의 동요를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 좀더 자리가 잡히고 나면 다시 시부모님과 합가할 예정이나 그동안 월남 난민회 일을 힘껏 돕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국국적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남편 한사람 믿고 한국으로 온 많은 여성이 버림받고 있는 현실을 그로서는 외면만 할 수 없다고 했다.
현재 난민회 회원은 남녀, 그리고 자녀들을 합해 5백 여명. 윙티·능씨처럼 정식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여성은 드물다. <김징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