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돈을 출몰하게 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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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로버트 솔로몬의 저서 '돈은 흐른다'(건국대 출판부, 2001) 중의 한 대목을 여기에 각색하겠다. 일본 제일의 한 외환 딜러와의 대화다.

"어떤 요소들이 매매에 영향을 미칩니까?"

"주로 초단기, 다소의 중기, 그리고 약간의 장기 요인들입니다."

"장기란 얼마를 뜻하지요?"

"대략 10분일 겁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도 시카고 상품거래소에 취직한 한 제자가 그의 선임자와 나눈 일화를 전해준다.

"거래를 좌우하는 장기적 계산은 무엇입니까?"

"나한테 장기란 항상 다음 10분이지."

10분이라면 담당 관리가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돈의 흐름이-홍수와 같은 도도한 '돈 줄기'가-확 바뀌고 만다. 이 급박한 '돈과의 전쟁'에서 이길 장사가 별로 없다. 최근의 부동산 투기만 해도 그렇다. 경찰.국세청.건설교통부 등 유관 기관이 전방위 진압 공세를 펴고 있지만, 부동산 정책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경제부총리의 호언은 현실이기보다 '의도된' 착시이기 쉽다. 공공 기관의 지방 이전은 더욱더 불안하다. 투기를 잡는다면서 사실은 부추기기 때문이다. 지방의 균형적 발전이란 취지를 이해하더라도 177개나 되는 기관의 이전 후보지를 2005년까지 선정하고, 2006년부터 용지 매입을 시작하고, 2010~2012년 사이에 이전을 완료하라는 엄명은 군사 소개(疏開) 작전을 방불하게 한다. 정부는 땅값이 오르는 이전 대상 지역과 주변의 혁신 도시에 '불이익'을 줄 계획이라지만, 이미 일고 있는 투기 열풍은 눈도 꿈쩍 않는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사람들이 화폐를 수요하는 이유로 상품 교환을 위한 거래적 동기, 미래의 필요에 대비한 예비적 동기 외에 '투기적' 동기를 열거했다. 투기라는 용어가 점잖지 않다고 해서 우리는 '투자적' 동기라고 배웠으나 지금 생각하면 케인스가 옳았다. 그는 주식 투기로 떼돈을 벌었으며, 보수적인 투자보다 저돌적인 투기에서 불황의 출구를 찾기도 했다. 토빈이라면 자본 이동에 세금을 물리자는 '토빈세' 제안으로 투기 자본가들을 섬뜩하게 만든 학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 업적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그는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미국의 신문들은 "예일대 교수,'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이론으로 노벨상 수상"이라고 일면에 보도했다. 각종 금융 기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달걀 바구니를 만들어 내 고객을 끌어들인다.

6공 때도 특단이란 이름의 서슬 푸른 조처를 연발했지만 토초세 같은 시책은 뒷날 위헌 판정을 받았다. 문민정부도 "땅을 가진 것을 후회스럽게 하겠다"고 날을 세웠으나 그 후회는 만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안 되는 것을 강제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을 '부자들의 스트라이크'니 투기와의 전쟁이니 따위의 발상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에 "전 세계 부동산이 다 올라도 한국은 올라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발언의 진의를 모르는 바 아니나, 전 세계의 부동산이 다 오르는데 우리만 가만있다면 한국의 부동산은 세계 투기꾼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헌법만큼 바꾸기 어려운 투기 대책을 내놓겠다는 청와대 정책실장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법과 주먹 일변도의 규제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옛날과 달리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는데도 부동산이 요동을 친다. 옛날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2차, 3차 담보의 부동산에조차 대출 제의가 뻔질나고, 심지어 집값의 120%까지 빌려준다는 현수막이 나붙는 판국이다. 우물 안에서 도리질하는 지금이 차라리 다행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 국제 투기에 열광하고, 해외 부동산을 걸터듬는다면, 한국은 산업 공동화에 이어 '돈의 공동화'마저 일어나게 된다. 나도 투기는 잡고 투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완고한 사람이지만, 돈에 물꼬를 터주고 몰아야 한다. 그것은 부자들에 대한 굴복도 아니고, 투기와의 전쟁에서 패배도 아니다. 먼저 돈을 흐르게 하라. 결코 출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