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례대표 의석 대폭 확대가 헌재 결정 취지 살릴 정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9호 03면

지난달 30일 헌법재판소가 현행 선거구 획정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직후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왼쪽에서 둘째)이 헌재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정 의원은 지난해 11월 충청권 선거구 획정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했었다. [뉴시스]

“내년 상반기 중 비례대표 의석을 크게 늘리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해 국회의 국민 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내린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안 헌법 불합치’ 결정의 의미를 짚기 위해 중앙SUNDAY가 1일 마련한 전문가 대담의 결론이다. 대담에 참여한 강원택(정치학) 서울대 교수와 김종철(법학) 연세대 교수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2대 1 또는 1대 1로 바꾸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헌재 결정의 참뜻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비례대표 의석 증대를 위해 국회 의석수를 늘리는 게 불가피하며, 개악 우려가 큰 중대선거구 대신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고 제언했다.

[헌재발 선거구 빅뱅]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헌재의 결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강원택=늦은 감이 있지만 옳은 결정을 내린 거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정치권이 자신의 과제(선거구 개편)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헌재의 사법적 판단에 의존한 건 비판받을 일이다.
▶김종철=우리 선거법은 국민 대표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정치를 위축시켜 왔다. 국회에 자신들이 원하는 의원을 보내지 못한 국민 다수가 선거의 비민주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이유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그런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를 줬다. 하지만 선거구 획정 개편 권한을 국회에 준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그렇다면 선거구 개편을 획정하는 주체는 누가 돼야 하나.
▶강=미국은 10년에 한 번씩 기계적으로 선거구를 조정한다. 우리의 경우 선거구가 지역주민들 삶의 공동체와 연동돼 있어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을 계기로 정치와 무관한 제3자들이 선거구 개편에 나서야 한다. 개편 기구를 국회 안에 두게 되더라도 중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원장은 외부 인사가 맡고, 위원진에도 정치인은 들어가지 않는 게 맞다.
▶김=헌법 41조에 따르면 선거구는 국회에서 법률로 정한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선거구를 개편하는) 게임의 당사자들이니, 이익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럴 경우 실질적인 입법권은 국민이 갖고, 의원들은 형식적인 입법권만 갖는 게 헌법의 정신이다.

-여야가 담합해 영호남 의석 증감비율을 짜맞추고 비례의원 의석을 줄이는 방식으로 헌재 결정을 넘어가려 하지 않을까.
▶강=과거 사례를 보면 정치권이 ‘농촌의 지역 대표성이 약화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역’이란 이해관계는 이젠 낡은 개념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은 고용이나 주거 같은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이다. 따라서 보다 큰 틀에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일례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처럼 인구 상·하한 지역구 격차가 3대 1이 돼야 하느냐, 2대 1이 돼야 하느냐의 논의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예를 들어 호남을 하나의 권역으로 하고, 이 지역 인구에 걸맞게 의원을 뽑으면 된다.
▶김=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인구비례에 따른 것이니 결국 도농 격차는 계속 존재하게 되지 않나.
▶강=도농 격차는 지역 아닌 직능 간의 격차다. 비례대표제를 통해 농촌 대표를 많이 뽑아 농업계의 이익을 대표하게 하면 된다.

-바람직한 선거법 개편 방향은.
▶김=독일식 비례명부제를 과감히 도입해 의원 수를 400명으로 하고 비례와 지역구 의원비율을 1대 1로 하는 것이다. 양원제를 도입하는 것도 방안이나 개헌을 해야 하니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강=예를들어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40%의 득표율을 올리면 의석을 무조건 40%(120석) 가져가고, 이 안에서 지역구로 채우지 못한 의석을 비례순번대로 배정하는 것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다. 이 제도는 신규 정당의 국회 진입을 넓게 보장하고, 전국적 득표율에 맞춰 의석을 배분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우리가 택해 가야 할 방향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현역 의원들의 반발 때문에 이렇게 지역구를 획기적으로 줄이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역구는 현행 수준을 유지하되 비례의원 의석을 배로 늘려 지역구 의석의 절반 수준까지 올리는 방안을 제안한다.

-그러면 국회 의석수를 늘려야 하지 않나.
▶김=의석 증대는 불가피하다. 의석을 늘리는 게 과연 공익에 반하는 것이냐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학술적으로 볼 때 의석을 동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권력이나 자본이 국회의 국정 통제를 꺼리기 때문에 나오는 거다. 행정부 입장에선 국정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의원 숫자가 적을수록 좋다. 그런 점에서 의원 수는 어느 정도 늘려야 한다. 의원 숫자가 늘면 희소성이 떨어져 특권도 많이 내려놓을 것이다.
▶강=나도 의석을 늘려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다. 의석이 늘면 세비 등 국회에 줄 세금이 늘어난다는 비판이 있지만 국가예산이 절감될 효과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늘어난 의원들이 국가예산(올해 기준 356조원)의 1%만 줄여도 3조원 넘는 세금이 절감된다. 국회의 투명성이 높아지면 행정부에 대한 통제력도 커진다. 의석이 늘면 가장 괴로운 이는 공무원들일 거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온다.
▶강=중대선거구제는 문제점이 더 많다. 유신이나 5공 시절 여당 후보의 손쉬운 당선을 유도하고, 야당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은 게 중대선거구제다. 또 정당이 복수공천을 하기 때문에 후보 입장에선 당의 브랜드보다 본인의 이미지가 중요해진다. ‘돈 선거’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거다. 과거 일본이 중대선거구제를 택한 결과 파벌이 형성되고 금권·부패 정치로 이어졌다. 그래서 1994년 중대선거구제를 없앤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중대선거구제가 왜 자꾸 거론되는지 모르겠다.
▶김=그렇다. 기성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력의 진입을 막는 선거제도가 중대선거구라고 본다.

-하지만 소선거구제는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와 양당 구도를 고착시키는 주범이라 비판받아 왔다.
▶강=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면 그런 문제점은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다만 정당들은 비례대표 공천을 투명하게 해 자질과 인품을 갖춘 인사를 후보로 내야 한다.

-헌재 결정을 개헌과 연결시키는 움직임도 있다.
▶김=현재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개헌 논의는 왜곡된 부분이 많다. 현행 대통령제가 제왕적 대통령제라면서 이원집정부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헌법상으로 보면 현행 대통령제는 결코 제왕적이지 않다. 대통령이 제왕적이냐 아니냐는 헌법 조문이 아니라 권력을 실제로 운용하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의원 공천권이나 검찰총장·국세청장 같은 권력기관 수장 인사의 오남용 여부가 ‘제왕적 대통령’의 판단 기준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헌법을 먼저 바꿀 필요가 없고, 선거법을 개정하는 게 우선이라 본다. 정말 개헌을 하려면 검찰총장 직선제나 감사원 분권화 같은 실질적인 분권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의원들의 속내엔 정권 재창출이나 의원의 특권 강화 같은 다른 목적이 깔린 듯하다.
▶강=개헌의 대상으로 떠오른 ‘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6명의 대통령이 적법하게 당선되고 정권도 두 차례 교체돼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달성됐다. 이제는 국민이 직접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국회는 거대양당에 장악돼 있고 국민이 참여할 공간도 봉쇄돼 있으니 자꾸만 국회 밖에서 정치행위가 일어나는 거다. 결국 87년 체제를 극복할 실질적 개헌은 근 30년간 국민을 속박해온 지역주의 정치구도에서 벗어나는 데 달렸다. 그러려면 헌재 결정을 계기로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고 다당제가 가능해지도록 선거법부터 바꾸는 게 우선 필요하다.

-선거법 개정 시점은.
▶강=내후년(2016년) 4월이 총선이니, 정기국회 직후 논의에 착수해 내년 상반기 안에 선거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여야가 선거법 개정을 거부하고 비례의석 줄이기 등으로 넘어가려 한다면.
▶강=얼마 전 노무현재단 세미나에서 ‘지금 친노 세력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만 빌린 기득권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했는데 그 얘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더라. 국민의 정치불신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안철수 신드롬도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감의 결과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헌재의 선거구 개편 요구를 또다시 ‘제 밥그릇 지키기’ 식으로 넘어가려 한다면 다음 총선에서 여론의 반발이 거셀 수 있다. 그 결과 제3세력이 국회에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김=정치권이 선거구 개혁을 거부한 결과 국민들이 총선에서 감정적으로 제3세력에 몰표를 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의미 있는 현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들이 정치를 직시하고,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구조가 부족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신중하게 처신하며 공론을 선도해야 한다.

진행=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정리=송영오 인턴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