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4)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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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개안의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60년이전 한국 프로복싱의 실상은 참으로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무모한 매치의 감행으로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만 59년의 송재구 사건이다.
한국 프로복싱 60년 사상 선수가 링 위에서 쓰러져 인생을 마감한 것은 송재구가 것 케이스이며 아직까지는 유일한 불상사다.
그때까지 한국 프로복싱계는 팬들의 흥미를 끄는 국제 이벤트라 하여 주한 미군 선수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한 미군 중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한 진짜 프로가 있는가하면 용돈 몇푼 벌자는 욕심, 혹은 장난기로 허세를 부리며 나오는 엉터리도 있었다.
이런 대회를 열면서 주최측도 양쪽 선수들의 체중을 측정, 같은 체급끼리 대전시키는 복싱의 기본조차 내팽개치기 일쑤였다.
흔히 국내의 플라이급 선수가 미들급의 덩치 큰 미군선수를 일방적으로 찌르고 쏘고 하는 만화같은 쇼가 벌어지기도 했다.
송재구는 한국의 제2대 페더급 챔피언이었다. 초대 챔피언은 필자였다.
여기서 초대, 혹은 2대라 함은 53년 이후의 통합 랭킹을 말한다.
해방후 대한권투연합회와 대한권투협회로 대립되어 있던 프로복싱계는 53년에 대한권투연맹으로 통합되면서 각 체급에 걸쳐 통합 챔피언을 결정했던 것이다.
11월 서울운동장 배구장엔 초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다. 노천의 특설링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탄력있는 매트가 없이 두터운 나무판자 위에 군용텐트 천을 깔아놓은 캔버스는 어름장 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3년째 플라이급 챔피언 자리를 누리고 있던 송재구(당시 24살)는 스피드가 뛰어난 기교파. 일반 관중들은 물론 권투인들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적의 마이티 마우스인 송재구가 미련한 곰을 통쾌하게 혼내 주리라는 기대와 흥미로 몰려들었다.
상대 선수는 흑인병사였다. 이름은「슐」. 키는 송재구보다 크게 우세하진 않았으나 체구는 다부졌다. 주최측의 오산이 여기에 있었다.
신장만 엇비슷하면 같은 체급으로 간주, 대결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슐」의 체급은 세 체급 위인 웰터급이었다. 또 「슐」은 입대전 프로에 입문하여 상당한 수련을 쌈은 수준급이었다.
공이 울리자 송재구는 발랄하게 움직였다. 그러나「슐」은 침착했고 도무지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매치라는 느낌이 금새 링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경기는 계속했다. 3라운드부터 우열은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
송재구는 이를 악문 결의로 대들기는 했다. 워낙 빠르므로「슐」이 맞기는 많이 맞았다. 그러나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송재구가 대나무 회초리를 몇번 휘둘렀다하면 「슐」은 우람한 해머로 한대 내지르고 나왔다. 송재구는 다운될 수밖에 없었다.
매라운드 한번씩 송재구는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집요하게 일어나 또 덤볐다.
6라운드때 링사이드에서 관전하던 한국 복싱의 태두 서정권씨가 보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박재근 주심(지난 76년 별세)을 향해 소리쳤다. 『헤이, 재키·박. 유 크레이지. 스톱 플리즈. 유 킬 힘…』(자네 미쳤어? 중지시켜. 선수 죽이고 말겠어)
박재근 주심은 당시 1급 복싱 심판이었다. 「재키박」은 일제 때 중국 상해에서 복싱 선수로 활약할 때 얻은 별명이다.
서정권씨와 「재키박」은 그때부터 막역한 사이로 평소 영어로 얘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7라운드가 강행됐다. 사실 그때까지 송재구는 외관상 더 싸우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몰골은 아니었다.
그러나 7라운드가 시작된 직후 「슐」의 호된 일격이 송재구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혔다. 송재구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듯 흠칫하더니 기둥이 넘어지듯 정확히 뒤로 떨어졌다.
시멘트같이 딱딱하게 굳은 링 바닥에 그의 뒷머리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둘렸다.
불운의 복서 송재구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황급히 옮겨졌으나 이미 병원에 닿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뇌진탕이었다. 송재구는 20살에 바로 프로에 뛰어 들었으며 부평에 살면서 미군들에게 복싱을 배웠고 프로 데뷔후 30전 무패였다.
첫 패배가 죽음이었으니 얄궂은 운명이었다.<계속>【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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