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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트전후의 회고록(제2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소련이 이집트와 리비아에대해 허위정보전을 벌였던 거의 같은 시기에 「아메르」이집트군 총사령관이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샤롬 엘 셰이크점령을 묵인했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당황해진 「아메르」는 「낫세르」에게 샤롬 엘 셰이크항으로 통하는 아카바무입구의 티란해협 봉쇄를 명령하도록 전보로 요청했다. 「아메르」가 카이로에 돌아왔을 때 「낫세르」 물었다. 『당신의 요청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오? 그건 바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뜻하오. 당신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준비가 돼있소?』 「아메르」는 『각하, 우리군대는 어떠 사태에도 만반의 준비가 돼있읍니다』라고 자신있게 답변했다.
「낫세르」는 곧 이집트군에게 출동준비명령을 내렸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당시 이집트군 대부대가 남예멘에 주둔하고 있었다.
시나이우도 출병계획이 수립됐다. 5월22일 공군의날에 「낫세르」는 티란해협의 봉쇄를 발표하고,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주=이집트와 아랍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48년의 제1차 중동전은 아랍측의 패배로 끝났다. 그 뒤 양측은 게릴라·총돌을 거듭했으며, 56년10월 「낫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이스라엘은 10월29일 이집트영토인 시나이우도를 침공, 제2차 중동전이 발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가 정전을 거부하자 폭격을 감행했고 1l월5일 수에즈지대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1월7일 정전을 수락했으며 이에따라 양국 국경지대에 유엔긴급군이 배치됐다.)
이집트군은 가자지역과 샤롬 엘 셰이크고원으로 진격했으며 사흘뒤에 티란해협이 폐쇄됐다. 「낫세르」와 나는 매일같이 군사령부에서 상황을 보고받고 작전을 지시했다.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모였던 것은 6월2일 금요일이었다.
이무렵 전세계의 신경은 한껏 곤두섰다. 예루살렘에서는 「에체르·바이츠만」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에슈콜」수상은 전쟁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다. 「존슨」미국대통령은 양국에 자제를 호소했고 소련도 냉정을 되찾을 것을 요청하는등 전세계에서 메시지가 잇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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