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일왕의 옹색한 사이판 한국인 추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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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일왕 부처가 태평양전쟁 종전 60주년을 맞아 27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인.미국인 6만여 명이 숨졌던 사이판섬을 찾았다. 28일 오전에는 예정에 없이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추념 기념탑'을 방문, 4분 동안 평화탑 앞 도로에서 묵념하며 희생자의 혼을 달랬다.

한국인 1100여 명도 태평양전쟁 당시 사이판섬에서 희생당했다. 일왕의 전격적인 한국인 추념기념탑 방문은 일본 정부 내에서도 검토돼 오다 일왕이 강하게 원해 27일 밤 최종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왕의 사이판 위령 행사에 대해 일부에선 "명확한 과거사 반성의 표시가 없이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부각시키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일왕의 한국인 추념기념탑 위령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만시지탄의 느낌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일왕의 한국인 추념기념탑 위령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일본 신문.TV 등 어디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왕을 따라다닌 일본 취재기자에게 이유를 확인해 보니 "전부터 확정됐던 일정이 아니란 이유로 사진기자들이 수행버스에 못 탔고, 일부 취재기자가 버스에서 일왕의 위령 장면을 찍으려 하자 궁내청 관계자들이 촬영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29일 궁내청에 확인하니 "취재기자 중 누구는 카메라를 갖고 있어 찍고, 누구는 없어 못 찍으면 공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금지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처구니 없었다. 일정은 전날 확정돼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대표로 당시 장면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말이다.

그리고 일왕도 최소한 헌화 정도는 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60년 만의 참배치고는 너무 옹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일본 정부는 틈만 나면 "그동안 누차 (과거사를) 반성해 왔는데 뭐가 문제냐"고 한국과 중국에 항의한다. 그러나 1970년 12월 당시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이 전 세계 전파를 타며 얼마나 깊은 감동을 전했는지를 일 정부는 모르는 듯하다.

"기왕 할 것이면 확실하게 하라." 원만한 한.일 관계를 원하는 기자로서 일 정부에 던지고 싶은 말이다.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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