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아로요… 대선 때 선관위원과 '부적절한 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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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글로리아 아로요(58.사진) 필리핀 대통령이 2001년 취임 이래 최대 위기에 몰렸다. 지난해 대선 투표 기간 중 선관위 위원에게 전화해 선거 대책을 논의한 내용이 담긴 도청 녹음 테이프가 발단이 됐다. 이로 인해 그는 대선 결과를 조작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왔다.

27일 아로요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빨리 털어놓지 못해 유감이다. 판단 실수였다"며 전화 건 사실을 시인했다.

3주 동안 "사실무근"이라며 펄펄 뛰던 데서 180도 바뀐 것이다. 이달 초부터 수도 마닐라에서는 시위대 수천 명이 모여 "아로요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사임을 요구해 왔다. 대통령이 혐의를 시인함에 따라 하야 압력은 한층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지지도는 이미 곤두박질쳤다. 곧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는 상황이다.

필리핀 정국은 지난 10일 국가정보국(NBI) 2인자 사무엘 옹이 문제의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테이프 내용은 아로요 대통령이 한 선관위 위원에게 전화로 "야당 페르난도 포 2세 후보와 100만 표 이상 차이로 이길 수 있겠느냐"고 묻자 "표 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는 군부 관계자에게서 건네받았다고 옹은 밝혔다. 이에 대해 아로요 대통령은 "테이프는 조작된 것이며 개혁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음모"라고 주장했었다. 그는 TV 연설을 한 이날도 "대선 결과가 어찌 나올지 신경 쓰여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던 도중 선관위 위원과도 통화하게 됐다. 선거 결과 조작은 결코 없었다"며 사임 요구를 거부했다.

필리핀 선관위는 선거 기간 중 후보가 선관위와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옹의 폭로 이후 필리핀에서는 테이프 일부 내용을 본뜬 휴대전화 벨소리가 4만 회 이상 다운로드 되는 폭발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벨소리 중에는 빌리 조엘의 '어니스티(honesty.정직)'를 배경음악으로 한 것도 있다.

경제학 박사 출신인 아로요는 1992년 상원의원에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2001년 부통령으로 재직 중 영화배우 출신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축출되면서 대통령이 됐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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