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맥도널드 '알바' 모자도 박사모만큼 뿌듯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3면

노인들이 취업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통계청은 지난달 현재 60세 이상 취업자가 251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60세 이상 취업자가 250만 명을 넘어선 것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3년 이후 처음이다. 이 중 65세 이상 초고령 취업자도 145만 명으로 10년 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현재 60세 이상 노인은 모두 644만여 명. 이에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65세 이상 노인 중 28.3%만이 노후생활을 준비했고, 나머지는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2004년 전국 노인생활 실태 및 복지욕구 조사). 노인들은 취업하고 싶어하지만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청년 구직자 못지 않게 어렵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도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이들을 괴롭힌다. 실버 취업을 위해 노인은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했다.

올해 일흔 살인 정두호씨. 정씨는 요즘 직장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투잡스족'이다. 서울 서초구 센트럴시티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일주일에 두 차례 6시간씩 일한다. 또 서초구의 한 빌라단지에서 건물관리원으로 일한다. 일주일에 세 번, 24시간씩 근무한다.

정씨는 "맥도널드에서 하는 일은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며 "햄버거에 들어갈 빵과 고기를 굽고 야채도 넣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물관리원은 빌라 경비원"이라며 "하루 24시간을 일한 뒤 맞교대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몸은 힘들어도 출근하는 날은 항상 가슴이 설렌다"며 "노인에게 일거리야말로 생명을 연장해 주는 샘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값지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건강관리도 더욱 철저히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휴일엔 친구들과 등산도 하고 부인과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닌다.

정씨는 36년간 근무했던 농업공학연구소에서 8년 전 정년 퇴임했다. 서울대에서 농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들어간 첫 직장이 연구소였다. 농업공학연구소에서 퇴직한 뒤 약 3년간 몇몇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65세가 되자 강사 자리가 끊겼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집에서 TV나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장 서초구의 고령자 취업알선센터를 찾았다. 정씨의 이력을 받아든 센터 측은 추천할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박사학위에 2급 공무원 출신의 경력을 가진 정씨에게 소개할 '고상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이때 담당 직원에게 자신의 경험 한 토막을 들려줬다. 96년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농업 분야 협상을 위해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맥도널드에 들렀을 때 백발의 노인이 일하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정씨는 담당 직원에게 "체면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못한다"며 "내 건강 상태에 맞는 일이라면 뭐든지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개받은 곳이 현재 일하는 맥도널드의 점원과 아파트 관리원 자리였다.

정씨는 "노인은 일과 돈, 건강이 있어야 오래 산다"고 강조했다. 주변 노인들에게도 틈만 나면 이 '진리'를 역설하곤 한다고 한다. 정씨는 "젊었을 때 다니던 직장과 월급을 비교하면 노년에 아무 일도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살고 있다. 건물관리원으로 일하면서 봉변도 당한다. "우유를 사와라"는 심부름을 시키는 입주민이 있는가 하면 반말을 서슴지 않는 젊은이들도 간혹 눈에 띈다.

정씨는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자녀들은 처음엔 아버지가 건물관리인으로 일하는 것을 말렸지만 지금은 모두 응원군이 됐다고 한다. 그는 "대학강사를 끝으로 나는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며 "지금은 새롭게 열린 '앙코르 인생'을 살아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일흔다섯 살까지는 일을 할 계획"이라며 "물론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 후에도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장정훈, 사진=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