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문화읽기] '물랭루주' 화가 로트레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8면

영화 물랭루주는 19세기 파리의 한 댄스홀인 물랭루주를 배경으로 뮤지컬 가수이자 창녀인 샤틴과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영화다. '붉은 풍차'라는 뜻을 지닌 물랭루주는 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에 세워진 후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렌치 캉캉'이란 춤을 대유행시켰고, 잔 아브릴 같은 세계적인 무용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 때 불에 탔다가 영화관이 되기도 했던 물랭루주는 지금도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유명한 댄스클럽이자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물랭루주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된 데에는 영화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의 공이 더 크다. 영화 물랭루주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을 하는 예술가로 잠깐 등장하는 툴루즈 로트레크는 영화와는 달리 댄스홀 물랭루주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1864년 대부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14세 때 사고로 왼쪽 허벅지가 부러지고 2년 후 정원을 산책하다가 다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후 성장이 멈추고 말았다.

당시 그의 키는 148㎝. 이를 비관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물랭루주와 그 주변의 술집과 매음굴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가 그린 물랭루주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물랭루주를 세계적인 명소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로트레크는 유전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로 더욱 유명하다. 로트레크가 걸렸던 왜소발육증은 유전적인 영향이 뚜렷한 질병이다.

기형이나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서로 한 쌍을 이루어야 발현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친척일수록 유해한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자식이 유해 유전자를 한 쌍으로 물려받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그의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로트레크의 왜소발육증은 근친혼의 위험 사례로 자주 인용돼 왔다.

왜소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로트레크의 장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1962년 프랑스 의사 라미 박사는 로트레크가 '피크노디소스토시스'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놨다.이 병은 성장기에 조골세포에서 골격을 형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카테스핀 K에 결함이 생긴 경우 걸리게 되는데, 쉽게 다리가 부러지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며 머리가 아주 크고 치아가 좋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로트레크 역시 이마가 튀어나왔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으며 평생 치통으로 고통받았다.

로트레크의 왜소증 유전요인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그의 여동생의 후손들에게 혈액 샘플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후손들은 검사 받기를 꺼렸다.

로트레크의 유해를 꺼내 뼈조각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하는 것도 단번에 거절했다. 로트레크의 후손들은 그것이 명백히 사생활 침해며, 로트레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체 장애와 알코올 중독, 조울증으로 점철된 로트레크는 37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화 7백37점, 판화와 포스터 3백68점, 스케치 5천84점을 남겼다. 물랭루주에서 황폐한 삶을 보냈던 그가 '육체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는 데는 과학자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