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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5)|제76화 화맥인맥(84) 월전 장우성|일중 김충현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일중(김충현)가와 우리집은 오랜 세의가 있다. 안동에 삼태사묘(안동김씨·장씨·권씨 시조묘)가 있는데 세집안 자손들이 1년에 한번씩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묘앞에는 번듯한 사당도 지어 놓았다.
안동김씨·권씨·장씨는 이처럼 형제의를 가지고 서로 결혼도 삼가는 사이다.
내가 일중을 알기는 해방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전초기부터 그와 더욱 가까이 지냈다.
일중은 나보다는 아홉살이나 아래지만 대음이어서 주석일화도 많다. 선비집안이고 문한가여서 일중뿐아니라 일중5형제를 모두 알고 지내는 터다.
일중은 경무국치를 당해 순절한 증조 오천 김석진공, 한말의 유명한 한학자인 조부 동강 김녕한공, 고지식한 선비였던 부 번계 김윤동공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명문가의 2남으로 서울서 태어났다.
1921년 4월2일생―. 맹자의 생일과 같다.
문현 충현 창현 응현 정현 5형제가 모두 서에 능하지만 백씨취(김문현)은 75년에 각고했고, 일중과 여초(김응현)는 이미 서예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
창문여고교장 백우 김창현씨는 한문학의 대가다. 김정현씨는 서울대문리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중엔 나와 가까이 지냈다.
일중은 일제교육은 시키지 않겠다는 조부 김녕한공의 뜻에 따라 가학으로 사서삼경을 배우고 나서야 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서예도 한문공부를 하면서 익히기 시작했다. 한자말고 궁체글씨도 잘 쓴다.
독자적으로 한글고체를 만들어낸 노력가―. 49년 1회 국전부터 서예부 추천작가가 된 실력자이다.
해방이 되자 맨 먼저 「글씨본」을 만들어낸 서예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일중은 중동학교 재학시절에 이미 전국의 서예백일장을 석권해서 필명을 날렸다.
해·행·전·예·초 오체에 두루 능하지만, 항서·예서에 특히 뛰어난 당대 최고의 서예가다.
일중은 60년부터 73년까지 국전심사위원으로 서예발전에 이바지했고, 「우리글씨 쓰는법」(41), 「배우고 본받을 편지체」(47년), 「중학서예」(55년), 「고등서예」(55년), 「서예집성」(64년), 「국한서예」(70년), 「일중 한글서예」(79년)등의 책을 펴서 후진을 양성하고 서예의 바른 길을 일깨워줬다.
지난해는 호텔신라 다이너스티홀에서 회갑기념으로 낸 「서집」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일중의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많지만 단연 술이야기가 으뜸일 것 같다.
한번은 마산의 유지로 한국기원이사장을 역임한 학초 최재형씨의 초청으로 일중과 함께「주유천하」를 한 일이 있다.
학초는 서화를 좋아해서 서화가 친구가 많다. 특히 풍곡(성재휴)과는 자별하게 지내는 사이다.
우리 일행중에는 동산방의 박주환사장도 동행, 주기투합한 여로가 되었다.
학초가 부산에서 소주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먼저 부산으로 내려갔다.
우산 소주공장부터 구경하고 요정에 가 입을 축였다.
한잔 두잔 한것이 분위기가 촉촉해지자 일중이 허리끈을 풀고 질펀히 앉아 하룻밤을 샐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은 학초의 집이 있는 마산으로 갔다. 어느 틈에 연락했는지 학초의 집에서도 잔칫상처럼 떡벌어지게 상을 차려내 놓아 여기서도 실컷 마셨다.
일중은 여느때는 묵덕보살처럼 앉아 있지만 술만 들어가면 목소리도 걸걸해지고 이야기도 잘해 이날도 술자리가 흥청거렸다.
연이틀 밤샘술에도 학초는 물론 일중·동산(박주환)이 보두 씽씽해서 부러울 정도였다.
어지간히 마셨다 싶었는데 학초가 진주로 가자고 제안해서 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주시를 버려두고 곧장 진양호에 차를 댔다.
오른쪽 절벽에 지은 아시아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진양호에 배를 띄웠다.
초여름 오후여서 기후가 좋았다. 놀잇배속에서는 마산서 싣고온 십년묵은 매실주로 취홍을 돋우었다. 이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않아 언덕에 배를 대고 주막에서 은어회로 동동주를 마셨다.
해가 넘어가자 호텔에 돌아와 저녁밥을 청해 놓고 또 술자리를 벌였다.
나이트클럽을 오르내리며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방안에 맥주병이 그득했다. 술에 곯아 뱅뱅했지만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남해대교까지 가 생선횟집에서 또 술을 마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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