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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의 연혁|일제가 왕궁 가로막아 총독부로 건립|한때 국회·대통령집무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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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중앙청-서울시 종로구 세종로1번지.
일제때는 식민통치의 본산인 조선총독부청사로 온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해방이후 지금까지는 관청의 상징으로 국민의 뇌리속에 못박힌 건물이다.
일제는 l910년 한일합방이후 남산에 있던 구통감부청사(그후는 왜성대로 불렸음)를 조선총독부로 쓰는 한편 1912년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안에 대지를 정하고 새청사작업에 착수했다.
중앙청위치
일제가 그많은 터 가운데 하필이면 경보궁뜰안을 택했을까.
남대문을 들어서면 멀리 백악아래 광화문이 보이고 그뒤로 웅장한 경국궁의 근정전이 보일때마다 나라잃은 백성들은 임금을 생각했고 그나마 옛왕궁을 보며 위안을 삼을수 있었다.
영구식민지화를 꿈꾸던 일제는 한국인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왕을 중심으로 한 「내나라 의식」을 뽑아 버리고 싶었고 그러기위해서는 기억의 구심인 왕궁을 가로막고 일제의 새상징을 내세우기로 한것이다.
착공 10년만인 1926년 총독부청사를 준공하면서 그들이 남긴 유일한 문서인 「조선총독부청사 신영지」(총무처보관)에 이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경복궁근정전, 광화문의 중심선과 총독부청사 중앙선이 일치케하여 근정전을 위압토록 하는 한펀 새 청사를 가리는 광화문은 경회루의 정동쪽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 항간에는 일제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을 다스리던 근정전 코앞에 건물을 세움으로써 다시는 힘을 못쓰게 만들뿐 아니라 북한산과 남산을 잇는 지맥을 끊어 이나라 정기를 끊어보자는 심사였다는 것이다.
풍수설에 따르면 경복궁은 명당중에 명당.
건설과정
「신영지」와 한국의 양식건축80년사 등에 따르면 19l2년 당시 「데라우찌」(사내정의)총독은 새청사춘비를 위해 총독부토목국 주관하에 기사l명을 구미로 파견해 관청건물을 연구케 하는 한편 당시 동경에 있던 독일인 건축가인 「게게라란덴」 (조선 호텔설계자)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런데 기본설계를 맡았던 「게게라란덴」이 1914년 도중에 병사하자 대만총독부청사계획의 경험이 있는 일본인 「노무라」(야촌일랑) 및 조선총독부기사 국지박이 설계의 마무리를 지었다.
공사의 착공은 1916년 6월로 당초는 8개년 사업이었으나 공사가 지연돼 10년을 넘겨 1926년 10월에 총6백75만l천9백82엔을 들여 5층 석조건물을 준공했다.
중앙청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건축자재인 화강석·대리석·목재·벽돌 등을 모두 우리나라 것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건물에 가강 많이 들어간 화강암은 당시 동대문밖 창신동 용두산에서 채석해 전차로 날랐고 모래는 한강 백사장에서 퍼 마포에서 전차로 실어날랐다.
대리석은 황해도 김천군 고동면 채석장(흑색)을 새로 발굴해 주로 이용하고 그밖에 민간인 소유의 평남 순천군 자산면(팥색)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백색) 경기도 양평군 운악리(뱀무늬) 채석장에서 공급받았다.
기초공사때 파일로 쓰던 목재는 압록강변의 낙엽송을 이용했고 벽돌은 관립 마포연화제작소에서 만들어 냈다.
대리석과 목재는 범선을 이용해 용산까지 올라와 그곳에서부터 전차로 현장에 날랐다. 이공사를 위해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와 현재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까지의 전차길을 새로 놓았다.
남북이 분단된 현실을 감안할 때 중앙청건물이 한반도 각지의 건축자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치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당시 건축비로는 청사건립비가 5백90만5천4백엔이고 조경비 등을 합쳐 총공사비는 6백75만1천9백82엔이 들었다. 연건평 9천4백71평으로 계산해 보면 평당 건축비가 6백20엔이 든 셈이다. 당시 쌀한가마에 12엔 정도였으므로 평당 건축비는 쌀 51.7가마 값이 된다.
건물의 역사
일제때는 이건물 3층, 현재 총리의 집무실이 총독의 집무실이었고 그 옆방이 정무총감실이었다. 3, 5대의 「사이또」(재등실)총독을 비롯해 「야마나시」(산리반조) 「우까끼」(우탄일성) 「미나미」(남차랑) 「고이소」(소기국소) 「아베」(아부신행)등 7명의 총독이 이곳을 거쳤다. 그밖에 2층에서 4층까지는 총독부의 각국이 들어 있었는데 현재 외무부가 쓰고있는 4층에는 주로 국장들의 방이 있었다.
설계 당시는 직원이 8백40명이었으며 40%증가할 것에 대비, 1천3백명 기준으로 건축했으나 그후 직원이 팽창해 5층창고(현외무부 사용)를 전부 사무실로 이용케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이건물은 군정청으로 쓰여졌고 48년 정부수립에서 6·25동란때까지는 국회와 행정부청사로 사용됐다. 이승만대통령은 현재의 국무총리실을 집무실로 썼다. 이대통령은 6·25후 화재를 입은 식민지잔재인 이건물을 헐어버리자는 얘기를 몇차례 했으나 워낙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어서 철거비가 엄청나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부수립이 되자 제헌국회가 현재의 중앙홀에서 열렸고 방청석은 목재로 2층을 가설해 사용했다.
6·25가 터지면서 이건물도 피해를 입어 후면이 많이 파손되고 전면에도 지금까지 그때의 총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9·28수복후 62년까지는 헐어버리고 싶은 이대통령의 뜻에따라 이건물은 거의 폐기되다시피 되었다. 다만 방이 부족한 일부부처에서만 피해를 당하지 않은 곳을 골라 몇개 사용했을 뿐이다.
5·16이후 61년부터 62년11월까지 2억7천7백10만원의 예산으로 전면수리·냉방시설을 새로 갖추었는가하면 68년12월에는 광화문 복원공사까지 끝내 현재의 면모를 갖추었다. <문창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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