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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찾아 거꾸로 살아온 예술 인생 60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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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호 24면

2003년 시작된 런던 프리즈(Frieze) 아트페어는 아트 바젤 다음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미술 장터다. 2012년부터는 근현대 거장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갤러리를 초대해 ‘프리즈 마스터스’를 진행하고 있다.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열린 올해 행사에서 영국의 말보로 갤러리가 내놓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몇 천억 원 대의 작품도 관심거리였지만 우리로서는 갤러리 현대 부스에서 개인전 형식으로 소개된 아방가르드 작가 이승택(82)의 작품세계가 더 눈길을 끌었다.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재조명 받은 팔순 작가 이승택

본인 스스로 거장이 되고자 한 적도 없고 오랜 세월 재야에서 활동해야 했던 이 노작가의 육십 평생 지치지 않던 실험적 예술혼을 이제 와서 ‘마스터스’라는 말로 위로하기엔 살짝 미안한 감도 든다. 하지만 프리즈 마스터스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거장의 솔로 부스로 꾸며지는 스포트라이트 섹션에 선보여진 그의 전시는 “왜 작가 이승택이 마스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개막 두 시간만에 작품 절반 팔려
14일 VIP 프리뷰부터 붐비기 시작한 그의 부스는 개막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출품작의 반 이상이 팔렸다. 컬렉터와 평론가로부터 모두 호평받은 작품은 여러 개의 고드렛돌을 밧줄로 매단 1957년 작 ‘고드렛돌’ 이었다. 테이트 모던에 소장된 이 작품을 알아본 컬렉터도 많았다. 돌돌 말고 실로 꽁꽁 묶어 연결한 종이를 벽에 설치한 ‘드로잉’, 대표작 ‘바람(Wind)’(풍어제에서 쓰는 붉은 천을 날리거나 나무에 매다는 작업으로 물질화할 수 없는 바람의 존재를 형상화한 1970년대 초반 작품)을 기록으로 남긴 사진과 도자기에 밧줄을 엮어 작업한 시리즈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니콜라 세로타 테이트 미술관 관장,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서펜타인 갤러리 관장, 3년 전 그의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 프랭크 코헨 등 영국 미술계 거물들이 부스를 찾아 관심을 표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명 큐레이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이번 프리즈 마스터스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가는 이승택”이라며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2012년 뉴욕 프리즈 아트 페어에 처음 소개했고 이번에 유럽에 처음 선보이는데 특히 유럽과 남미 컬렉터들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3년 전만 해도 국제 미술계에 인지도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의 훌륭한 작가를 알리고 한국 미술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 같아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조정열 갤러리 현대 대표의 말이다. 이 작가는 프리즈 기간에 열리는 야외 조각 프로젝트 선정 작가 10인으로도 뽑혀 작품 ‘삐라’가 리전트 공원에 전시됐다.

“재료가 변하니 세상 보는 인식도 변하더라”
한국에서 필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왔어요. 현대 미술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재료의 개발이라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어느날 고드렛돌이 물렁물렁하게 보였고 역설적인 반 개념을 생각해냈습니다. 이후 노끈으로 고드렛돌과 사물들을 묶기 시작했는데 모든 사물을 묶고 감으면 그 물성이 전혀 다르게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술 더 떠서 ‘그럼 물질적인 것만이 재료가 될 수 있을까? 비물질도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니 물·불·돌·바람·연기·안개를 이용하게 됐습니다. 재료가 변하니 세상을 보는 인식도 변하게 됐죠.”

그는 이미 1960년대에 화판에 불을 질러 한강으로 떠내려 보냈고 석상에 불을 지르는 ‘분신하는 석상’ 같이 당시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행위 예술을 시작했다. 재료의 물질성에 반해 비물질에 탐구한 그의 창작 영역이 우리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보는 사상으로까지 확장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본래 예술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입니다. 사회에 도전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이죠. 세상을 비틀고 세상에 역행하니까 예술이 막 생겼어요. 독설과 야유,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즐기다 보니 사회며 정치며 다 비틀었습니다. 나는 세상을 뒤집어서 보아왔어요.”

젊어서 미술사를 가르치며 피카소를 가장 존경했고 마르셀 뒤샹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인정했던 그였지만 서양의 미술계 역시 그는 뒤집어서 보았다.

“60년대에 서양 미술계를 소개한 잡지들을 보면서 ‘아, 서양이 별거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서구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반세기 전 했던 그의 생각과 예술가로서의 철학이 이제서야 서양의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존중받게 됐다. 시대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예술계 사조에 편승하는 것도 거부하고, 기성의 가치와 이데올로기와 제도에 반하는 작업이 이제 막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작가 이승택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우리가 허리를 곧게 펴고 꼿꼿하게 걸어가는 세상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땅 바닥에 뒹굴고 한쪽 눈을 지긋이 감고 세상을 삐딱하게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 1991년 작 ‘자각상’에 쓰인 문구처럼.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생각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았다.”

런던 글 최선희 중앙SUNDAY 유럽통신원 sunhee.lefur@gmail.com 사진 갤러리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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