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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지지할 국민 여론 얻으려면 국회, 무너진 신뢰부터 회복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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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호 01면

특정 이슈로 정치권이 움직이는 걸 무슨 정국이라 한다면 지금 한국 정치는 ‘개헌론 정국’으로 불릴 법하다. 여야 의원 155명이 지난 1일 “개헌 특위를 이달 중 구성하자”고 하자 6일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블랙홀’이라며 제동을 건 게 시작이었다. 2라운드에선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맞붙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16일 개헌을 입에 올렸다 하루 만에 “실수”라고 거둬들이자, 청와대는 21일 “실수로 언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비난했다. 김 대표는 청와대를 향해 거듭 사과했다.

개헌 놓고 대립 치닫는 정치권

그런 가운데 개헌이 왜 필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개헌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논의는 실종 상태다. 김 대표가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를 언급했지만 이 제도의 장점이 무엇인지, 한국에 적용 가능한지에 대한 검증도 찾아볼 수 없다. 또 박 대통령의 ‘경제 블랙홀’도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식의 방편론일 뿐 개헌 공약의 준수 여부를 경기와 연결 지을 근거는 약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동안 여야는 4년 중임제냐, 이원집정부제냐 같은 권력구조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또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한 뒤 2017년 대선 전 퇴임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연대해 집권한다는 식의 정치공학성 시나리오도 무성했다. 국민에겐 ‘87년 체제’가 수술대에 오르는 게 무슨 의미인지, 바뀐 시대상을 새 헌법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판단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며 내각제를 추진했던 김중권 변호사는 “개헌은 의원들의 합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민투표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개헌에 대한 국민의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개헌에 대한 국민 여론은 심하게 엇갈린다. 한국갤럽이 21~23일 10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행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으므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2%, ‘제도보다는 운영상 문제이므로 개헌이 필요치 않다’가 46%였다.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있다’가 46%, ‘관심 없다’가 48%로 양분됐다.

여론이 엇갈리는 데엔 국민적 불신의 대상인 정치권이 파워게임 양상으로 개헌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금처럼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에 소통이 안 되고 국회 운영이 엉망이라면 국민은 개헌을 ‘정치권의 제 밥그릇 챙기기’로 인식해 반대할 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헌은 박근혜 정부하에선 내년이 마지막 기회”라며 “하지만 개헌을 성사시키려면 정치권이 땅에 떨어진 신뢰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특히 ‘식물’이란 비판을 받는 국회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겠다며 자신의 권한을 늘리려는 게 거부감을 사고 있다.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장을 지낸 김철수(법학)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회가 주장하는 개헌안은 자신들의 권한 확대에 치중돼 있어 국민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종철(법학) 연세대 교수도 “정치 기득권자인 기성 정당들이 개헌을 제기하면 여야가 담합한 국회 카르텔만 강화될 위험이 크다”며 “개헌론의 주된 흐름이 권력구조 개편에 매몰된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의 의사와 참여를 강조한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그게 헌법정신에 맞다는 것이다. 김철수 교수는 “국민이 직접 개헌안을 만들어 청원할 수도 있다”며 “정치권은 국민의 의사를 적극 수용해 권력구조 개편뿐 아니라 국민의 권익을 보다 많이 보장하는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론 국회 개헌특위에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도 제시된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특위 위원장에 국회의원 대신 경륜과 인품을 갖춘 외부 인사를 앉히고 다양한 계층의 국민을 특위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개헌론을 주도해 온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 등 여야 중진들은 “개헌에 동조하는 의원이 재적의원 3분의 2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헌의 성패는 정치권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고 자신들의 이해보다 국민의 권익과 국가의 비전을 담은 개헌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 관계기사 3~5p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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