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빨래하는 맨드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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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은봉(1955~ ), '빨래하는 맨드라미'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듯한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라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일까? 칼 들면 음식이 나오고 호미 잡으면 풋것들 환하게 웃고 아이 다녀가면 씻은 듯 배앓이가 낫고 비싼 물건 앞에 서면 벌벌 떨고 경우 없는 짓 앞에서는 벌컥 화를 내다가도 하얀 손 만나면 부끄러워 저도 모르게 등 뒤로 감추는 두껍고 큰 손. 바로 어머니의 손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 안에도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무조건 희생만을 떠올리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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