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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웃다 80年] 34. 5·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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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코믹 연기를 하고 있는 필자.

어머니는 살아계셨다. 고향에서 집을 지키며 용케도 전쟁을 견뎌내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참 고마웠다. 그래서 매달 춘천으로 돈을 부쳤다. 스무 살 때 어머니의 염낭을 잘라 고향을 떠난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어머니, 꼭 돈을 벌어서 수백 배, 수천 배로 갚을게요'라고 다짐했던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씀씀이는 계획성이 없었다. 공연장에서 번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남은 돈을 보내는 식이었다. 당시 극단 배우들은 대부분 그랬다. 말단 연구생 시절부터 돈을 모르고 컸다. 푼돈이 생기면 밥 사먹거나 술 마시기에 바빴다. 한푼 두푼 돈 모으는 법을 알 턱이 없었다. 나중에 톱스타가 돼도 마찬가지였다. 극장에선 월급식으로 출연료를 주지 않았다. 그때 그때 일정하지 않게 돈이 들어왔다. 그래서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바로 꺼내 쓰기 바빴다.

하루는 아버지가 찾아왔다. 호적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전쟁 직후부터 4.19가 일어날 때까지 호적이 없었다. 본적지가 휴전선과 함께 이북 땅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호적 없이 동적부로만 지내자니 너무 불편하다"며 "가호적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께 비용을 드리면서 소원을 한 가지 말했다. "10년 동안 '배창순'이란 본명을 까맣게 잊고서 '배삼룡'으로 살아 왔어요. 이젠 그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호적에도 그렇게 올려 주세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 결과 지금도 호적에는 내 이름이 '배삼룡'으로 돼 있다.

1961년이었다. 나는 공연 때문에 내려간 대구에서 5.16을 맞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쿠데타가 벌어져 있었다. 도청과 시청 등 곳곳에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있었다. 방송에선 공약이 흘러나왔다. 나는 곧바로 짐을 쌌다. 4.19 때 얻은 교훈이 있었다. 단원들은 혼자 상경하는 나를 말렸다. 그러나 이튿날 다른 단원들도 결국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런 시국에 공연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배우들에게 5.16은 4.19와 달랐다. 4.19 땐 배가 고팠고, 5.16 땐 배가 불렀다. '연예인 궐기단'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연예인 궐기단의 본부는 나중에 TBC-TV의 운현궁 스튜디오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연예인 궐기단은 전국을 돌며 5.16 지지 계몽쇼를 하는 게 목적이었다. 배우들은 그런 정치적인 이유보다 출연료를 선불로 주는 파격적인 조건에 더 끌렸다. 당시엔 어느 극장에서 쇼를 하더라도 출연료를 선불로 주진 않았다. 연예인 궐기단은 소대별로 짜인 군대식 편성이었다. 나는 특별 소대에 편성됐다.

공연은 무료였다. 연예인 궐기단은 극장이나 마을의 큰 창고,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다 가설 무대까지 세우며 공연했다. 그리고 5.16 쿠데타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선전하는 공연을 했다. 이 두 달 동안 연예계는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렸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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