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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왜 철학을 전공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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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사회부문 차장

1990년대 초 들어간 대학에선 외국 시·소설 수업이 많았다. ‘위기’라는 단어와 함께 거론되는 ‘문·사·철’(문학·사학·철학)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인문계 대졸자를 안 뽑는 기류가 뚜렷하지만 당시에도 진로는 고민거리였다. 상경계가 각광받는 시대에 문학을 익히는 게 무슨 효용이 있느냐는 의구심이었다. 한 학과 교수는 “대학 교육이 출발한 중세 수도원에서 우선 가르친 것이 문학과 철학이었다”며 기능적 의미의 효용만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 될 효용도 따져보라고 조언했다. 대차대조표 대신 죽음이나 번뇌 같은 단어를 수업 시간에 떠올리던 동기생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도 대부분 취업에 성공했다.

 문·사·철의 낭만은 요즘 대학생들에겐 사치가 됐다. 입시 준비 내내 부모들이 “그건 대학 가서 하라”고 했겠지만 1~2학년도 취업의 무게에 짓눌린다. 인문계 취업률은 이공계의 절반 수준이어서 한 캠퍼스에 다니지만 졸업 후 희비가 엇갈릴 것임을 모두 알고 있다.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은 물론이고 해외 봉사활동에 상경계 복수전공까지 해보지만 인문계 구직난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하지만 취업난이 문·사·철 학생들의 잘못 때문은 아니다. 세포가 분열하는 성장기에 학교와 학원을 오갔지만 교사나 부모 누구도 고1을 마칠 때 정하는 문·이과 구별이 이런 차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수능 점수 높이기에 열을 쏟을 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탐색해볼 기회는 제공받지 못했다. 취업이 안 되는데도 인문계 학과는 넘친다. 일정 기준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준칙주의가 도입되자 대학들은 운영비가 적게 드는 인문계 정원을 늘렸다. 학생 성적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추천하는 고교 교사도 상당수다.

 문·사·철의 고민은 그래서 사회의 몫이다. 기업과 대학은 공동 프로그램이라도 만들어 기업이 원하는 자질이 무엇인지 안내하면 좋겠다. 구직자는 스펙 쌓느라 등골이 휘는데, 자기소개서에서 쳐줄 게 없다는 인사담당자들이 많아서다. 대학은 인문계생을 위해서도 인턴 같은 기업 연계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직무를 파악한 구직자의 취업 성공률은 확실히 높다. 산업 수요를 고려한 전공 구조조정과 초·중·고에서부터 진로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교육 당국에 목표가 아니라 당위여야 한다.

  국내 기업들도 상상력이 빚어낼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서라도 인문학 전공자를 외면하는 채용 구조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스티브 잡스는 고교 시절 휼렛패커드(HP) 인턴으로 컴퓨터 지식을 쌓은 뒤 리드대 철학과에서 인문학 소양을 길렀다. 페이스북 창립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컴퓨터 신동이었지만 하버드대에선 심리학을 주전공으로 택했다. 그는 심리학을 접한 이후 기술적 언어에만 능통했던 자신이 남의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문·사·철이다.

김성탁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