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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판교,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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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갈등 확산의 소용돌이‘ 7단계

1. 사고가 터진다.

2. 주변이 개입해 갈등을 키운다.

3. 피해자 입장이 강경해진다.

4. 당사자 간 소통이 끊긴다.

5. 갈등은 더 확산된다.

6. 공동체가 위기를 맞는다.

7.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른다.

대부분의 재난이 공공 갈등으로 번지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재난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주변이 개입한다. 성숙한 사회라면 그 개입이 해결의 촉진제가 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 증폭의 스피커가 된다. 시간이 갈수록 당사자들은 과격해지고 대화는 단절된다. 결국 공동체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갈등 연구자들은 이를 ‘갈등 확산의 소용돌이’라고 부른다.

 16명의 사망자를 낸 판교 참사 역시 갈등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는 사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습 과정만 보면 용케 격랑에 말려들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지 57시간 만에 협상이 타결되고 닷새 만에 장례가 끝났다.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은 이유, 세 가지를 찾아봤다.

 첫째, 대화 창구의 단일화다. 유족들은 문제 해결의지를 갖춘 대표(한재창씨)를 뽑았다. 경기도에서는 박수영 행정1부지사가 직접 나섰다. 둘은 협상의 전권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협상 결과가 함부로 번복되지 않을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각자는 입장이 강경해지지 않도록 내부를 향해 “좋은 선례를 남기자”고 호소했다.

 둘째, 돈이 아니라 기준으로 합의하려 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고가 나면 “총배상금 얼마” 식으로 합의를 하려 든다. 서로 액수가 맞지 않으면 대화는 중단된다. 이번에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 기준에 따라 배상금을 정하기로 합의했다. 사고 초기에 행사 주체인 이데일리와 성남시, 경기도 간에 책임 공방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3자는 책임 공방은 나중으로 미루고 장례·유족 문제를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 책임 분담은 수사·재판 결과를 보고 정하기로 기준을 세웠다.

 셋째, 신속 대응으로 외부 개입의 여지를 차단한 점이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해외출장 도중 급히 귀국했다. “경기도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경기지사의 책임”이라는 그의 일성(一聲)을 ‘오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갈등 관리자로서 첫 단추를 잘 끼운 것만은 분명하다. 사고 다음날, 유족들은 경기도·성남시에 법률·의료지원단 구성 등을 요구했다. 박 행정1부지사와 성남시는 돈 문제를 제외하고 유족 측의 요구사안들을 24시간 만에 모두 해결해 줬다.

 대화 중단의 위기도 있었다. 협상 타결을 선언하기 전날 밤, 환풍구에 올라간 희생자의 ‘과실비율’이 쟁점이 됐다. 희생자 과실비율을 높이려는 이데일리 측과 좀 더 낮추려는 유족 측이 대립했다. 유족들은 오후 10시, 10시10분, 10시30분 등 세 차례나 대화 중단을 선언하려 했다. 다행히 ‘과실비율 40%’ 선으로 갈등이 봉합된다. 2009년 수원에서 어린이가 환풍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사건의 재판 결과를 기준으로 삼았다.

 판교사고의 수습이 완료된 상황은 아니다. 부상자 대책이나 늑장 구조 과정, 책임소재를 둘러싼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유족과 경기도가 지금까지 보여 준 수습방식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갈등 확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점은 앞으로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대면조사를 한 적이 있다. 희망하는 국가를 위한 정치 분야 선결과제 1위로 ‘지역·계층·성별 등의 갈등해법 모색’이 나왔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갈등의 암초지대를 빠져나가는 조타 능력을 조금씩 익혀 갈 수 있을까. ‘판교 모델’은 그런 희망을 품게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