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적 여성운동은 「3·1운동」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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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로 63주년을 맞는 3·1운동은 그동안 다각적인 측면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시대적 상황에 따른 여성들의 대응」이란 입장에서 3·1운동의 연구는 오늘의 여성운동과도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3일 하오 3·1여성동지회 주최로 열리는 강연회에서 「3·1운동과 여성」이란 주제발표를 갖는 이현희교수(성신여대·한국사)는 20년대 여성의 역할과 그에 따른 시대적 의의, 그후의 여성운동에 미친 영향등을 재조명한다.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형성 배경은 근대화·개화등 민족적인 시련기를 맞아 여성의 힘이 동력화될 절실한 요구에 의해 대두된 것이라고 이교수는 전제한다.
당시 모든 단체활동이 중단되거나 폐지되었던 상황에서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김마리아·유관순·황에스터를 주축으로한 여성활동은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2·8독립선언 이후 종교인·가정주부·학생·기녀들까지 총동원되어 비밀결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3·1운동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이 주로 벌였던 사업은 상점을 운영하거나 국산품 애용·물자절약으로 마련한 돈을 회비로 모아 북경·상해등지의 독립운동단체에 보내고 국내에서 쫓겨 다니거나 해외에서 잠입한 밀사를 보호하는등 해외에 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임시정부와 접촉한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항일구국운동으로 집약되는 이러한 여성운동은 독립쟁취의 실패로 체포·구금·고문당하는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 개별항쟁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하나의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호응해 기존단체인 협성부인회·송죽회등을 발전적으로 해체하면서 다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20년대 여성운동의 대표적인단체로 꼽을 수 있는 대한애국부인회는 국권회복·군자금모금·기밀문서전달·정보수집·연락책임등을 맡았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 헌법에 기초를 둔 남녀평등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근대적인 의의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권리를 찾는다.
다시 말하면 애국적인 의욕만으로 이루어졌던 1910년대의 여성운동에 비해 20년대의 여성운동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결성으로 법적인 보장아래 그 기반을 구축했다고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그 후 국내 여성운동은 27년 다시 근우회가 조직되면서 지금까지의 정치활동 일변도에서 점차 교육·문화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간다
이러한 일련의 여성운동에서 3·1운동이 끼친 영향으로는 ▲여성운동의 조직화 ▲민주정부구성에 기여 ▲남녀 평등권을 구축하는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의 병행등이 지적된다.
따라서 역사적 관점에서 3·1운동을 통해 본 여성운동의 평가는 뚜렷한 목적의식아래 모든 어려움이 구국이라는 차원에서 극복되었다는 점에서 정의되어야할 것이라고 이교수는 덧붙인다. <육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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