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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메이니…그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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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란 회교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어떠한가. 본사가 입수한 미국 극비문서 책자의 미 국무성·중앙정보국(CIA) 기록들은 미국이 회교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던 78년 초부터 「호메이니」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음을 밝히고있다.
국무성과 CIA의 비밀문서들은 그를 타협도, 관용도 베풀 줄 모르는 인물로 보았으며 『그의 냉철성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호메이니」에 대하여』라는 비밀보고서(비밀문서 책자 제1책 159페이지 이하)는 그의 인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혼자서 최종결단>
『「호메이니」가 정책을 결정하는 태도는 조용하고 용의주도하다. 그 끈기 있게 여러 견해를 경청한 다음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린다. 이 결단은 혼자서 내린다. 한번 결정하면 번복하는 일은 없고 반드시 실행한다.-생략』
이 보고서의 영어원문은 수록되어있지 않고 페르시아어 번역문만이 비밀문서 책자에 실려있으며 곳곳에 생략된 부분이 많다. 내용의 생략은 이 책을 펴낸 이슬람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비밀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생략-. 서구인이나 서구화되거나 그런 경향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에도 「호메이니」는 마찬가지 태도다. 토의문제를 놓고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의견을 꺼내고 싶으면 여느 때와 같은 조용한 태도로 절도 있게 표현한다. 그와 면담할 때에는 일반 대화에서처럼 「저…」 「에…」 「그리고」 따위의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합의나 타협, 관용 등의 소지는 거의 없다. 「호메이니」에게 소신을 조금이라도 바꾸도록 설득시킬 수는 거의 없다. 그는 이런 태도가 남을 경시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략-』

<연속된 망명·추방>
「호메이니」의 냉철한 성품은 40년 전에 어린 딸이 익사했을 때 취한 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아내가 절망하여 허탈상태에 빠져있는데도 그는 조용히 딸의 주검 옆에서 기도만 올렸고 슬픔이나 흥분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평상시의 목소리로 『알라신께서 나에게 주신 아이를 이제 도로 데리고 가셨다』고 말했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냉철성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78년부터 비밀문서에 「호메이니」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반체제세력을 분석하는 문서들이 종교계의 지도자로 「호메이니」를 꼽고있다(비밀문서 책자 제8책 35페이지).
「호메이니」가 15년간의 망명생활을 보냈던 이라크의 남부에는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있었다. 이 두 성지에 이란의 시아파 신도들의 순례가 해마다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으므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호메이니」는 이란인들과 항상 접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접촉을 끊기 위해 「팔레비」는 이라크 정부에 압력을 넣어 78년 9월에 그를 파리로 다시 쫓았다. 이것이 오히려 「호메이니」를 세계 매스컴의 각광을 받도록 했다.
78년 초까지만 해도 「호메이니」를 분석한 비밀문서들이 『그는 개방적이다』느니 『그는 철저한 폐쇄주의자다』느니 하며 서로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비밀문서 책자 제8책 71페이지).
그해 5월말 이후 비밀문서들은 「호메이니」를 「팔레비」를 제거시키려하는 위험한 극렬 인사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부터 이란소요의 주도권은 온건한 종교인의 손에서 과격파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호메이니」가 이라크에서 그 소요를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비밀문서 책자 제8책 111페이지).
78년 10월에 접어들면서 가두데모가 격화되자 비밀문서들은 「호메이니」가 이 소요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은 국왕보다 더 막강하다고 보았다. 「호메이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렇게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정치·종교의 합일>
또 비밀문서들은 당시의 여론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반체제 인사들은 미국이「팔레비」 정권의 유일한 뒷받침이라 주장하며 친「팔레비」 인사는 미국이 석유수입과 무기판매가 보장되면 누구와도 타협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란의 일반여론도 돌변하여「호메이니」의 추종자가 아니더라도 그가 분별 있게 행동하며 외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이란인들은 「호메이니」가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비밀문서 책자 제13책 155페이지).
78년 초 무렵의 문서들이 그를 극렬분자, 외국인 혐오증환자 및 선동가로 본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회교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호메이니」에 대해 언급한 문서들이 비밀문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밀보고서의 최대관심은 이슬람정권의 진정한 실권자인 「호메이니」가 직접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보다 합일을 원칙으로 한다. 이란국민의 90%가 신도인 시아파 이슬람이 국교로 된 것은 「사파위」조(1500∼1732년)때였다. 이 시기부터 시아파의 성직체계는 점차 확립되어 「팔레비」왕조가 1925년에 창립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바크 방해공작>
이슬람의 성직자는 이때까지 교육·민사관계재판·이슬람 율법의 해석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팔레비」왕조의 등장과 함께 밀려오는 서구세력에 영향을 받아 현대화를 추진하게 되어 교육과 사법활동은 성직자의 손에서 국가기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은 「팔레비」왕조에 반감을 갖게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은 최고 종교지도자인 12대 이맘(Imam)이 서기 874년에 사라졌으나 그가 죽은 것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숨어있다고 본다. 이 『숨은 이맘』(Hidden Imam)을 대행하는 지도자가 곧 성직자의 최고 원로인 「우즈마」다.
이 시아파의 최고지도자 「우즈마」는 성직자들의 합의에 의해서 선임된다. 비록 「팔레비」왕조가 수많은 개혁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확장했지만 이 「우즈마」의 선임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1962년에 「우즈마」 「아야툴라·부루지르디」가 사망하자 그 후임에 「아야툴라·호메이니」가 가장 유력시되었으나 비밀경찰 사바크의 방해공작으로 그 선임이 연기됐다. 1963년에 「호메이니」가 콤시에 모인 10만의 신도 앞에서 「팔레비」는 제거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그는 체포되었고 연이어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호메이니」는 64년 이라크로 추방되었고 「우즈마」의 선임은 보류되었다.

<이슬람 천국으로>
「호메이니」는 회교혁명의 시발점을 63년 6월 5일로 본다.
이날은 그가 콤시의 연설로 투옥된 뒤 대규모시위가 벌어진 날이다.
이래서 회교혁명 임시정부는 79년 6월 5일 혁명시발의 16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비밀문서 책자 제1책 570페이지).
「호메이니」의 이상은 자신의 정권장악에 있지 않고 이슬람국가의 창립에 있었다. 한 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호메이니」는 「플라톤」에 심취되어 있었다. 「플라톤」은 철학자를 통치자로 하는 이상 공화국의 수립을 꿈꾸었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신학자를 통치자로 하는 신권공화국의 창건이 「호메이니」의 이상이었다』(비밀문서책자 제1책 576페이지). 「호메이니」의 꿈은 회교헌법이 제정되고 회교성직자의 영도아래 이슬람공화국이 탄생함으로써 이뤄졌다.

<끝>

<주·미국 cia와 국무성의 비밀보고서를 분석한 「미국의 중동공작」시리즈는 오늘로써 끝냅니다. 이 극비문서가 수록된 책자(전 13책 8권)는 본사가 1월초에 테헤란에서 입수해 전문가와 본사 외신부가 합동으로 3주간에 걸쳐 분석을 끝낸 다음 연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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