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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현씨 집성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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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주시 중심가를 벗어나 동으로 두어 마장쯤, 제주 십경 가운데 하나 「사봉낙조」의 사라봉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낮은 잔릉을 넘어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제주시 화북2동, 속칭 거노 마을이다.
멀리 관서변경에서 발원한 현씨가 이곳 남해천리 탐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조선조 초.
시조 담윤의 9세손인 사경이 제주목사로 제주에 들어온 것이 인연이다. 사경은 벼슬이 갈린 뒤에도 육지로 나가지 않고 눌러 앉아 새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제주 목사공파의 시조.
거로 마을은 사경의 세 아들 중 큰아들 수인이 자리잡았던 곳. 둘째 부인은 남제주군 남원, 막내 귀인은 성산에 터를 잡아 이후 현씨는 크게 번성을 이루게 된다. 지역적으로 현재남한 내 현씨의 20%(1만 2천명)쯤이 제주에 몰려있을 정도.
『제주도는 마을형태가 육지와는 다릅니다. 집성촌이라고 해도 한 성씨만 몇 십호가 울을 맞대고 사는 경우는 없고 통상 2백∼3백부터 1천여 호 되는 마을에 여러 성씨가 섞여 살아요. 이 거로 마을도 우리 할아버지가 들어와 마을을 열었지만 현재 현씨 외에 김·양·부씨 등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읍니다.』
이 마을 출신인 전 제주대학교수 현인홍씨(69)는 50∼60년 전까지만 해도 현씨가 60여 호 살았는데 현재는 30여 호로 점점 주는 추세라고 했다.
섬에 남아 살면서도 현씨네는 해변이 아닌 해발 50m이상의 중산간 지역에 자리잡고 농사를 전업으로 한 것이 특징. 후대에 내려오며 고기잡이하는 후손도 생겼지만 근래까지도 대개는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사농공상의 계급사회에서 선비가 종사해도 좋은 유일한 직업은 농사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해방직후 공비들의 무장반란 때는 산간마을이 가장 많이 피해를 보면서 현씨 가도 적잖은 피해를 보았고 의지로 많이 옮겨가기도 했다.
거로 마을도 제주의 다른 마을처럼 10여 년 전부터 귤 재배가 시작되면서 보리·수수 등 잡곡농사만 짓던 때의 가난을 벗었다. 「특별히 잘 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없이」 3천여 평쯤의 감귤과수원과 4천∼5천 평 가량의 논농사로 가구 당 소득은 3백 만원선. 유족 하다. 대부분 자녀를 고등학교이상에 보내며 대학은 외지로 유학시키는 사람이 많다.
『현씨들을 두고 이곳에서는 보통 「고집하다」고 합니다. 고집스럽다는 뉘앙스보다는 원칙에 충실하려는, 순진하다는 의미가 강하지요.
때문에 다소 사교성이 모자란다는 단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30여대를 내려오며 이 만큼 번성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선조의 유풍 덕 아니겠읍니까.』
제주지역 종친회장 현필호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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