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31. 전업 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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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극장 안에 설치된 링에서 코믹 복싱을 하고 있는 필자(右)

악극단도 피란을 왔다. 당시 부산에는 서너 개의 악극단이 있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윤부길쇼'와 이난빈씨가 이끄는 'KPK', 그리고 일반 극장을 돌던 '전진 악극단' 등이었다. 아는 단원에게 줄을 놓아 나는 '전진 악극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지숙은 'KPK'의 무용수로 들어갔다.

돈을 벌진 못했다. 일반 극장을 도는 악극단은 수입이 별로였다. 전쟁통에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다. 그래서 '전진 악극단'에는 일이 좋아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일 바쁘게 분장하고, 이리저리 극장을 쫓아다녀도 늘 빈털터리였다.

지숙은 달랐다. 일정한 출연료를 받는 쇼가 매일 두 스테이지씩 있었다. 집에 올 땐 휴지나 미군 보급품을 두 손에 들고 왔다. 우리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하루빨리 큰형 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 세 끼를 모두 통조림으로 때웠다. 그때는 통조림도 고급이었다. 대부분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으니까. 지숙은 단돈 1원도 아꼈다. 마침내 우리는 부산 생활 한 달 만에 형 집을 나왔다. 그리고 판잣집 셋방을 하나 얻었다.

이듬해 봄이었다. 전선은 철원 부근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우리는 뒤늦게 혼인신고를 했다. 지숙은 아기를 가졌다. 임신 8개월째였다. 만삭의 그는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는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다. 우리는 모아둔 돈을 곶감 빼먹듯 쓰고 살았다. 결국 그가 서울로 가자고 제의했다. "서울에는 피란간 집이 많아 방세를 안내도 된대요. 아기를 낳을 때까지 두어 달 수소문하면 일자리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어렵사리 한강 도강증을 구했다. 그리고 서울로 갔다.

정말 빈 집이 많았다. 우리는 청파동에 자리를 잡았다. 삼각지의 미군 기지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연예 대행업체가 여럿 모여 있었다. 그해 6월 지숙은 딸을 낳았다. 내 코를 쏙 빼닮은 첫 딸이었다. 산모가 찬바람을 쐬면 안 좋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내가 살림을 도맡았다. 악극단 시절, 밥짓고 빨래하는 일에 도통한 나였다. 아기 기저귀까지 일일이 내가 다 빨았다.

지숙은 삼칠일 만에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삼각지로 나가 일자리를 구했다. "아기는 누가 키우려고?" "당신이 있는데 뭔 걱정이유?" 졸지에 '전업 남편'이 됐다. 그땐 우유도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시중에 나오는 우유는 탈지분유라 아이에게 먹일 수도 없었다. 나는 이웃에 수소문해 겨우 해결책을 찾았다. 우유 대신 쌀물을 먹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밥을 지을 때 물을 넉넉히 부어요. 그리고 보글보글 소리가 나면 솥뚜껑을 열고 쌀물을 떠내서 먹여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내의 퇴근 시간은 늦었다. 무대가 밤늦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풀벌레가 우는 여름밤, 나는 늘 대문 밖에 서서 아내를 기다렸다. 아기를 업은 남자, 그때만 해도 청승맞은 풍경이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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