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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국가재건최고회의」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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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16주체들은 진압의 움직임 등 그들을 가로막고있던 장벽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5월19일「국가재건최고회의」란 통치기구로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민정이양까지의 과도기간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주도할 통치기구였다.
해산된 국회의 기능을 대행하는 입법은 물론 행정·사법까지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국가최고통치기관」이었다.
최고회의는 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혁명위를 최고회의로 개칭키로 함에 따라 그 명칭이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최고회의는 이때부터 63년 12월17일까지 2년7개윌간에 걸친 군정기간동안 국가통치의 핵심체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농어촌고리채정리법·정치활동정화법·국회법·선거법은 물론 화폐개혁·헌법개정 등 정치·사회·경제전반에 걸친 일대수술작업을 주도했다.
최고회의의 구성경위를 우선 살펴본다.
5윌18일 육사생들의 지지데모와 장면내각의 총 사퇴로 거사가 성공단계에 접어들자 군사혁명위원회는 이날 하오 30명의 혁명위원과 2명의 고문을 선출했다.

<김홍일씨 등은 고문>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김윤근 해병준장 사회로 열린 회의에서 선출된 혁명위원은 장도영(육·중장) 박정희(육·소장) 김종오(육·중장) 박림항(육·중장) 김신(공·중장) 이성호 (해·중장) 김성은(해병·중장) 정내혁(육·소장) 이주일(육·소장) 한신(육·소장) 유양수(육·소장) 한웅진 (육·준장) 최주종(육·준장) 김용순(육·준장) 채명신(육·준장) 김진위 (육·준장) 김윤근(해병·준장) 장경순(육·준장) 송찬호(육·준장) 문재준(육·대령) 박치옥 (육·대령) 박기석(육·대령) 손창규(육·대령) 유원식(육·대령) 정세웅(해병·대령) 오치성 (육·대령) 길재호(육·중령) 옥창호(육·중령) 박원빈(육·중령) 이석제(육·중령) 등 장성급 19명과 영관급 11명등 30명.
고문에는 김홍일 예비역육군중장과 김동하 예비역해병소장이 추대됐다.
혁명위원회는 다음날인 19일 하오 제1차 전체회의를 열고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는 한편 청사를 태평로의 국회의사당(현재의 세종문화회관별관)으로 옮겼다.
최고회의 전신인 30인 군사혁명위가 발족되기에 앞서 박정희 소장은 5월16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의장으로 하는 5인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발표했다.
박정희 소장·김동하 예비역해병소장·채명신 준장·송찬호 준장·윤태일 준장 등으로 발표된 이 5인 위원은 혁명군에도 장성급이 많다는 것을 과시키 위해 박 소장이 즉흥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당사자들조차도 어떤 경위로 임명된지를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30인 혁명위가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혁명정부의 기틀이 마련되게된 것이다.
혁명위원의 선출기준은 이미 거사 전에 구성됐던 것으로 ▲혁명의 실질적 주체를 형성한 장교 중 육사 각 기별로 신망이 높은 2명의 대표 ▲전문분야에 조예가 깊은 장교로서 국사와 정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 ▲직접 또는 간접으로 혁명에 가담한 자 ▲신체상 결함으로 국사처리에 지장이 없는 자 ▲청렴결백한 장교로 정평이 있는 자 중에서 군별·계급별·기별로 뽑도록 되어있었다.
이 같은 기준외에 3군의 단합을 위해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자동적으로 포함시키기로 하여 김신·이성호·김성은 장군이 임명됐다.
혁명위원 중 장성급과 대령급은 박 소장이 김동하 예비역소장 등과 협의해 대부분 선정했고 8기 이하의 영관급에 대해서는 5명의 TO만 주고 자체적으로 선출토록 위임해 투표로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박원빈 이석제씨가 뽑혔다.
30명이라는 한정된 TO때문에 혁명위원(후에 최고위원)의 선출과정에서 끊임없는 잡음이 뒤따랐다.
다음은 공수단장이었던 박치옥씨(당시대령)의 증언.
『혁명당일인 16일 발표된 5인 군사혁명위원은 물론 실무 부서에도 혁명군을 끌고나온 김윤근 해병준장·×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군단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등 주역의 이름이 빠져있어 박 소장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박 소장은 <우선 바쁘기 때문에 만든 것이며 곧 정식기구가 발족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과연 그의 말대로 18일이 되니 혁명위를 구성하더군요. 박 소장이 장경순 준장에게 <장성급과 주력부대를 지휘했던 대령급 장교들은 이미 인선을 끝냈으니 일반 영관급 장교는 서로 상의해서 5명을 선출해 오라>고 지시했어요. 박 소장의 지시를 장 준장이 영관급 장교에게 전달했더니 김형욱 중령이 나서 <혁명에 관계없는 장성들은 들어가고 우리들에겐 왜 5명만 배정하느냐>고 항의를해 장 준장이 김 중령의 따귀를 때렸다더군요. 나도 현장으로 달려가 김 중령을 야단쳤던 기억이 납니다. 투표결과 내 동기생인 최재명·이원엽 대령이 빠졌지요. 그러나 젊은 장교들은 선거로 뽑는게 가장 좋다고 했죠.』
영관급 혁명위원을 투표로 뽑았다는 사실은 L씨(전 감사원장)의 증언으로도 입증되고있다.
『박 소장에게 갔더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의견을 대표할 사람을 골라오라>며 5명의 자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소령을 포함한 70∼80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육본회의실에 모였지요. 5명이 너무 적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지요. 투표를 했는데 내가 최고득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인선이 얼마나 진통을 겪었는지 5명을 선출하는데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걸렸었다고 박원빈 전 최고위원도 회고했다.

<해병은 순조로와>
투표에서 탈락한 일부 주체들은 불평을 하기도 했다. 일부인사들은 지역안배가 안됐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음은 한웅진씨(당시 준장)의 증언. 『30명의 위원 중 직접 혁명에 가담치 않았던 사람이 들어있어. 불평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혁명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K씨(당시 대령)같은 이는 투표에서 탈락되자 <엉뚱한 친구들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어요.
박 소장도 그를 무척 좋아했는데 너무 불평을 많이 하자 불러서 힐책을 하더군요.』
선출과정에서 이 같은 일부 잡음도 없지 않았지만 해병대의 경우에는 순조롭게 인선이 끝나기도 했다.
군별 안배에 의해 해병대에 할당된 혁명위원수는 3명. 당시 해병대의 인선경위를 김윤근씨(당시 준장)로부터 들어본다.
『발표하루전인 17일로 기억됩니다. 박 소장이 불러 <해병대엔 3명을 배정할테니 인선해 주시오>라고 말하더군요. 계급순위로 따지자면 예비역 소장인 김동하 장군과 내가 우선권이 있었지요. 나머지 1명이 문제였어요. 혁명에 적극 참여한 오정근 중령·조남철 중령·최룡관 소령 중 세 사람 중에서 한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세 사람 모두양보를 해요. 그래서 해병대 사령부에서 활약했던 정세웅 대령을 추천했죠. 사령관 김성은 중장은 당연직이었구요.
그런데 육군 측에서 <오정근 중령이 한강도강시 공이 컸는데 뺄 수 있느냐>고 의견을 제시해와 그후 있었던 최고회의 1차 개편 때(5월27일) 오 중령이 임명됐어요.』
혁명위원 중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본인도 그 확실한 이유를 모른 채 임명된 사람이 정내혁 소장과 한신 소장.
증언들은 두 사람이 정군운동을 지원했던 장성이고 특히 한신 소장은 5·16 거사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지도자로 추대하려던 움직임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아는 박 소장이 포함시킨 것으로 안다고 했다.
정 소장(현 국회의장)의 임명경위설명.
『내가 국방대학원에 입교했었던 때로 기억되는데 젊은 장교들이 찾아왔어요.
정군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중장이상은 모두 옷을 벗어야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반문을 했지요.

<나 자신도 비교적 청렴하게 생활해왔다고 자부하지만 솔직이 말해 월급만 갖고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육군소장인 나도 사실상 정군대상이 된다. 기계적으로 중장이상이라든가 소장이상이라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어요.
그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주체가 아닌 사람으로는 나와 한신 소장만이 들어갔더군요. 최고회의 발족 후 하룻만에 초대 군사내각의 상공장관으로 입각하게돼 일주일만에 최고위원직을 물러났지요.』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하룻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될때 일부 위원들은 최고회의라는 명칭에 불만을 토로했다.
박치옥씨(당시 공수단장·대령)의 증언.
『19일로 기억됩니다. 김종필씨가 최고회의편성표를 들고 회의장엘 들어왔어요. 표지에는 「국가재건 최고회의」라고 씌어진 차트였습니다. 차트 첫장을 넘기려는 순간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김윤근 준장·문재준 대령 등 이북출신위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김일성이 많이 쓰는 「최고」라는 단어만 봐도 신경질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초대군사내각 조각>
그래서 <하고많은 이름 중에 최고회의가 뭐냐>고 고함을 쳤지요. 우리들의 고함으로 장내가 시끄럽게 되자 박 소장이 <우선 시간이 급하니 따질 것은 나중에 따지고 내용을 들어보자>고 중재에 나서 할 수없이 그대로 넘어가 버렸읍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날 의장에 장도영 중장, 부의장에 박정희 소장을 각각 선출하고 본격적인 초대혁명 내각조각작업에 들어갔다.
박 부의장의 지시에 따라 몇몇 최고위원들이 각각 자신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각료명단을 제출했고 박 부의장은 이를 참고로 하여 장도영 중장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초대 군사내각을 임명, 발표했다.
새 내각은 ▲수반 장도영 ▲외무 김홍일 예비역육군중장 ▲내무 한신 육군소장 ▲건설 박기석 육군대령 ▲보사 장덕승 공군준장 ▲교통 김광옥 해군대령 ▲재무 백선진 육군소장 ▲법무 고원증 육군준장 ▲국방 내각수반겸임 ▲문교 문희석 해병대령 ▲농림 장경순 육군준장 ▲상공 정내혁 육군소장 ▲체신 배덕진 육군준장 ▲내각사무처장 김병삼 육군준장 ▲공보부장 심흥선 육군소장 등으로 김홍일 예비역중장을 제외하곤 전원이 현역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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